ADVERTISEMENT

촛불은 구체제 끝내라는 명령이다

중앙일보

입력

오종택 기자

오종택 기자

주말 촛불집회 7주째를 맞은 10일 광화문광장은 80만 명(주최 측 추산)의 인파로 뒤덮였다. 전날 국회를 통과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자축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축제 마당이었다. 이날 전국에서 모두 104만 명이 승리의 깃발을 들었다.

[뉴스분석] 현대사 바로 세운 광장 정신 # 편법 판치는 질서 청산하고 # 새로운 시대로 가라는 명령 # '이러려고 촛불 들었나' 자탄 다시 나오지 않게 #촛불의 열기, 개혁의 동인 돼야

국회의원 234명의 찬성(반대 56명)으로 통과된 탄핵소추안은 ‘촛불 시민’의 승리다. 아니 모든 국민의 승리다. 광화문으로 나가지 않은 사람들도 국정 농단을 처벌해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는 결연했다. 국회 표결 전 발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응답자의 81%가 탄핵을 찬성했다.

이제 탄핵 열차는 궤도에 올려졌다. 하야와 탄핵 사이에 오락가락하던 불확실성은 사라졌다. 180일 이내에 헌법재판소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시기는 더 앞당겨질 가능성이 크다. 촛불 시민의 준엄한 명령, 국회의 압도적 의견을 헌법재판소가 외면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권성동 국회 법사위원장은 “여론과 압도적 가결률 등을 감안해 절차를 가능한 한 앞당겨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하면 박 대통령은 평범한 시민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불소추 특권이 없어지고, 재판과 응분의 처벌을 받게 된다. 검찰 수사에 이어 특검이 더 자세한 진실을 밝혀낼 것이다.

탄핵이 결정되면 60일 이내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한다. 벌써부터 정치권은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시민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높일 때도 정치권은 선거의 유불리를 계산했다. 그러나 ‘박근혜 아닌’ 다른 누군가를 대통령 자리에 앉히는 것으로 끝날 일인가. 그것만으로 촛불 민심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권력의 교체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분노는 사라지고 대한민국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광화문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들고 일어선 촛불은 박근혜 대통령만을 겨냥한 게 아니다. 최순실로 상징되는 부패한 특권 기득권에 대한 반기(反旗)다. 정의와 관용이 사라지고, 돈과 특권과 편법이 보통사람의 권리를 짓밟는 낡은 질서에 대한 폭발이다. 정경유착과 불평등, 헬조선·수저계급론·청년실업·노후 빈곤으로 상징되는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구체제)에 대한 주체적 거부가 광장의 민심으로 표출된 것이다. 박 대통령의 탄핵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절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낡은 대한민국을 리셋(reset·초기화)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리빌딩(rebuilding·재건)하는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촛불 민심을 평가했다.

돌아보면 ‘광장 정신’은 굴곡진 현대사를 지탱하고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치가 특권을 강화하고 반칙을 일삼으며 국민의 고통을 외면할 때마다 시민들은 깃발을 들었다. 4·19 혁명이 그랬고, 6월 항쟁이 그러했다. 맨손에 평화적으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총칼보다 무서웠다. 그때마다 정치권이 수습에 나섰다. 그런 계기를 통해 민주주의가 한 걸음씩 발전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매번 부족했다. 집권자를 바꾸는 것으로 끝났다. 광장의 함성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했다. 자유와 정의, 평등의 보편적 가치들은 장식으로 치부됐다. 경제·사회·문화의 변화, 공정하고 투명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를 만드는 데 소홀했다. 국민들은 정치권을 외면하고, 위기에 놓인 민주주의에 경종을 울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구시대의 막내가 되겠다”고 했다. 낡은 질서를 끝내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집권자와 집권세력만 바뀌었을 뿐 우리 사회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10여 년이 지나 오히려 유신시대를 닮아가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유화했다. 내각과 대통령 비서실을 제쳐놓고, 아무 검증도 받지 않은 민간인 최순실에게 국가 기밀을 맡기고, 판단에 의지했다.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 장관을 임명했다.

경제도 박정희 시대의 개발경제로 돌아갔다. 정부가 주도하고, 기업을 윽박질러 가르치려 했다. 기업인을 청와대로 불러 형사처벌을 미끼로 돈을 걷고, 권력자가 원하는 사업에 투자하도록 요구했다. 심지어 가장 창의적이어야 할 문화·스포츠 분야까지 정부가 휘두르려 했다. 기업의 인사에 개입하고, 영화의 제작 방향까지 조종하려 했다.

‘촛불’은 힘의 정치에 대한 저항이다. 생존권을 위협받는 서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국정을 사적 이익을 위해 주무른 데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폭발이다. 복지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어 야당을 무력화해 당선된 대통령은 선거가 끝나자 공약을 바로 폐기해버렸다. 망가진 사회안전망에 둔감했다. 촛불에 분노의 기름을 부은 것은 ‘금수저’의 편법이다. “돈도 실력”이라니…. 권력자의 측근은 정부 예산을 퍼주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출석하지 않아도 좋은 성적을 받고, 대통령만 팔면 기업에서 돈을 뜯어낼 수 있는 추악한 실상은 결국 꼬리를 밟혀 들켜버렸다.

이번에도 정치세력은 빨리 다음 정권을 차지하려고 마음이 급하다. 대선 시기를 놓고 4월·6월·8월이니 하며 손익계산에 분주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대통령 취임에 박수를 치기에는 너무 허탈하다. 불평등·불공정한 구조, 편법이 판치는 낡은 체제를 이대로 놔둔 채 대통령을 새로 뽑는다고, 정권을 교체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힘의 정치를 막을 방도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통해 새로운 시대로 가라는 광장의 엄중한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촛불을 드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김호기 교수는 “새로운 사회와 국가를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대통령 탄핵이 첫 번째 문턱을 넘은 것이라면 두 번째 과제는 정의롭고 유능한 정부를 출범시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박명림 연세대 정치학과 교수도 “200만 촛불 시민이 보여준 절제와 열기를 개혁의 동인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제 시작이다. 과거 청산보다 더 중요한 건 미래다. 국민의 입에서 ‘내가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던가’ 하는 자탄이 다시 나와서는 안 된다. 정치권과 시민세력이 협조와 견제를 통해 생산적인 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과제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김진국 대기자 kim.jinkoo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