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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혁신 가로막는 ‘직원 상대평가’ 언제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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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염지현 경제기획부 기자

염지현
경제기획부 기자

연말이면 직장인들은 학창시절로 돌아가 ‘성적표’ 걱정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대다수 국내 기업이 매년 말 직원의 성과를 일정한 기준에 따라 상대평가로 A·B·C 등급을 매기고 이를 바탕으로 승진과 연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상대평가는 물론 장점이 있다. 저성과자를 가려낼 수 있고, ‘좋은 게 좋다’ 식으로 평가가 관대하게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직원 간 협업에 걸림돌이 되고 지나치게 결과에 집착하게 하는 게 단점이다. 직원을 위험 회피 성향을 자극해 혁신과 창의성을 막는 부작용도 있다.

최근 골드먼삭스 등 글로벌 기업이 잇따라 상대평가를 폐지하고 다양한 성과 평가 시스템을 실험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특히 지난해 8월 상대평가의 원조 격인 제너럴일렉트릭(GE)이 30년 넘게 고수하던 ‘10% 룰’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20세기 경영의 귀재로 불린 잭 웰치가 1981년 경영을 맡으면서 도입한 제도다. 전체 구성원의 상위 20%에겐 성과급과 승진 기회를 제공하고, 중위 70%는 상위 등급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나머지 10%에게 퇴출을 권고하는 다소 과격한 방식이었다. GE뿐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어도비·골드먼삭스 등 상당수 글로벌 기업이 상대평가를 폐지했다. 미국에선 상대평가를 하는 기업은 14%(2011년 기준)에 불과하다.

이와 달리 한국은 대기업의 74%(2015년 노동 연구원 501곳 기업 설문)가 매년 상대평가로 등급을 매긴다. 당연히 기업 내부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많다. 국내 유명 수출 기업에 다니는 A 대리는 “연초에 개인 목표를 세울 때면 연말 평가가 부담돼 목표를 낮춰 잡는다”며 “시간이 갈수록 최대한 실수를 줄여서 중간만 하자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한 제조기업에서 설계를 담당하는 B씨 역시 “5명이 한 팀으로 일을 해도 평가자 잣대에 따라 등급이 달라진다”며 “평가 기준이 애매하다 보니 오히려 사내정치를 조장한다”고 말한다.

정보기술(IT)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이제는 ‘규모(노동·자본)’가 아닌 ‘머리(창의성)’로 경쟁하는 시대가 됐다. 신년 초마다 많은 대기업이 혁신을 외친다. 하지만 혁신의 원천인 인재를 낡은 평가의 틀 속에 묶어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굴뚝산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한국 기업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바로 상대평가를 폐지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래도 벤치마킹을 할 바엔 제대로 해보자. 구성원 간 협력을 통해 집단지성이나 창의력을 발휘하는 게 더 중요해진 시대다.

염지현
경제기획부 기자
yj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