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칠레 FTA비준 서둘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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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최근 한국무역협회를 비롯한 경제5단체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국회 비준을 요청하는 서한을 2백72명 국회의원 전원에게 송부하였다.

1998년 양국간 FTA를 추진키로 합의한 이래 5년이나 시간을 끌어온 만큼 더 이상 비준을 늦추어서도, 거부하여서도 안 되는 시급한 현안임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먼 나라 얘기로만 알려졌던 FTA가 '우리의 문제'로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출범(95년) 이후다. 세계적으로 보면 WTO 출범 이후 단 7년간에 체결된 FTA는 1백19건으로 WTO 이전 40년간 체결건수(65건)의 두배에 이를 정도로 FTA는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반면에 무역대국이라 자처하는 우리만이 그 어느 나라와도 FTA를 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다. FTA를 맺은 나라끼리는 면세로 수출을 하는데 우리만 꼬박꼬박 관세를 물고 있으니 이대로 가다간 우리의 수출경쟁력이 약화되고 우리 상품의 시장점유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정부는 칠레를 첫번째 FTA 파트너로 택한 것인가?

칠레는 우리와는 상호 득이 되는 보완적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정치.경제적 모범 국가로 미국.유럽연합(EU)과는 물론 인근 국가를 포함한 30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덕에 지역의 거점시장으로 매우 중요한 나라다. 또한 우리만 FTA 체결을 미룰 경우 그간 어렵게 확보한 시장을 다른 나라에 빼앗길 우려가 크다.

실제로 FTA 발효가 늦어지는 바람에 대(對) 칠레 주종 수출품목인 자동차.휴대전화의 경우 지난해에 비해 올 상반기 중 우리 기업의 시장점유율은 크게 떨어졌다(자동차는 2위에서 5위로, 휴대전화는 11%에서 8%로 하락).

정부는 본래 칠레와 함께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검토하였지만 종합적인 고려 끝에 칠레로 낙착되었는데 이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대 국민 의견수렴과 홍보.설득 과정이 미흡한 채 단 몇개월 만에 정책이 결정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뒤 5년이나 시간을 끌고 있는 것도 대외적으로 좋은 모양은 아니다. 따라서 정부는 앞으로 주요국과 FTA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절차적 투명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물론 칠레와의 FTA가 우리에게 이익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농업계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고 공산품을 수출하는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고통을 분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칠레와의 FTA는 비준되어야 하고 조속히 발효되어야 한다. 국익 전체로 보아 득이 실보다 크다는 점을 들먹일 것도 없이 개방은 멈출 수 없는 거센 조류(潮流)이며 FTA 미체결시 우리가 입게 될 기회 손실은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이 지나치게 정치적 고려를 앞세워 비준을 거부할 경우 외국에서는 한국을 '개방형 통상국가'는커녕 시대에 뒤처진 '민족주의'로 회귀하는 나라로 보게 될 것이다.

칠레와의 FTA는 시작일 뿐이다. 대외무역 의존도가 70%에 이르는 우리나라가 꾸준히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수출을 늘릴 수 있도록 시장의 외연(外延)을 넓혀야 한다.

가급적 많은 나라와 '특별한 관계'를 맺어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하여야 한다.'농업 부문이 피해를 보니 FTA를 안 하고 말지' 하는 생각은 곧 무역전쟁이 치열한 바깥 세계에 눈감고 귀막고 우리 안마당만 지키겠다는 생각인데 이는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비현실적이다.

전체 국익을 늘리면서 FTA 이행 특별법과 농업계 대책을 통해 농민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하는 것만이 현명하고 유일한 우리의 살 길인 것이다. 칠레와의 FTA에 대한 비준은 무조건 반대할 문제가 아니며 성격이 다른 이익집단 간에 연대하여 투쟁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국회의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해 본다.

한영수 한국무역협회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