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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육영수 영정 전소…범인 “박 대통령 하야 안 해 방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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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경북 구미시 상모동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 옆 추모관이 1일 불에 탔다. 추모관은 박 전 대통령이 기거하던 생가 옆에 지은 건물이다. 탄핵될 상황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이 큰불이 난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한 지 2시간 쯤 뒤다. 경찰은 현장에서 방화 혐의로 백모(48·경기도 수원)씨를 붙잡아 정확한 범행 동기를 조사하고 있다.

1일 오후 3시15분쯤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불이 나 추모관을 모두 태웠다. [프리랜서 공정식]

1일 오후 3시15분쯤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불이 나 추모관을 모두 태웠다. [프리랜서 공정식]

경북 구미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15분쯤 박 전 대통령 생가의 추모관에서 백씨가 박 전 대통령 영정에 1L 들이 플라스틱 물병에 담은 시너를 끼얹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불은 삽시간에 건물 전체로 번져 추모관을 모두 태우고 옆에 있는 생가 초가지붕 일부로 옮겨붙었다. 박 전 대통령 생가는 1993년 경북도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됐다. 753㎡ 부지 위에 생가와 추모관·관리사무소로 구성돼 있다.

수원 사는 40대, 1L 시너통 끼얹어
박정희 동상 훼손 이어 또 불상사
주민 “경제 일으킨 분 생가에…” 분통

소방 당국과 생가 관계자들이 10여 분 만에 불을 껐다. 하지만 추모관에 있던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이 모두 불에 탔다. 백씨는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인근 지구대 경찰관들에게 붙잡혔다.

화재 당시 박 전 대통령 생가 인근 식당에 있던 방문객 강범석(61·구미시 남통동)씨는 “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화재경보기가 울려 바깥으로 나갔더니 추모관 쪽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며 “소방차가 도착해 진화작업이 시작됐고 이어 방화범으로 보이는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고 전했다. 강씨는 “경찰에 붙잡힌 남성의 표정이 태연했다”고 덧붙였다.

화재 전 추모관의 모습. [프리랜서 공정식]

화재 전 추모관의 모습. [프리랜서 공정식]

백씨는 경찰 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하지 않아 방화했다”고 진술했다. “박 대통령이 하야하든지, 하야를 안 할 거라면 자결을 하든지 해야 하는데 둘 중 하나를 하지 않아 방화했다”고 주장했다.

백씨는 이날 수원에서 기차를 타고 구미에 도착했다. 생가를 방문한 백씨는 추모관 방명록에 ‘박근혜는 자결하라. 아버지 얼굴에 똥칠하지 말고’라고 쓴 뒤 불을 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경찰에서 자신의 직업을 웹사이트 운영자라고 밝혔다. 백씨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박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는 게시물을 다수 올려 뒀다.

백씨는 지난달 29일 박 대통령의 ‘자결’ ‘처단’ ‘죽음’ 등과 관련된 게시물을 5차례 더 올렸다. 지난달 28일에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야 새벽이 온다’는 글도 올렸다. SNS 자기소개에 수도권 대학 의학전문대학원에서 공부(박사과정 중퇴)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적어 둔 것도 눈에 띄었다.

사단법인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 전병억 이사장은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이 최근 훼손된 뒤 구미시와 보존회가 생가 주변을 순찰하는 등 방화 등에 대비해 왔다”고 말했다. 보존회에 따르면 불을 지른 백씨는 이날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추모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뒤 추모관에서 연기가 났다고 한다. 전 이사장은 “방문객을 일일이 의심할 수는 없다”며 “추모관의 제단과 영정, 벽면에 붙어 있던 사진이 모두 소실됐다”고 말했다. 60대 주민(여)은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신 박 전 대통령의 생가에 불을 질러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에서 백씨는 4년 전인 2012년 12월 대구시 동구 신용동에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에도 불을 지른 혐의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백씨는 당시에도 현장에 A4용지 2장 분량의 편지를 남겼다. 편지에서 그는 ‘노태우를 단죄하라’ ‘국민의 재산을 훔치고 쿠데타를 일으킨 도적의 똘마니’ ‘부패한 정치인의 표본’ 등의 주장을 담았다. 백씨는 또 2007년에는 서울 송파구에 있는 사적 101호 삼전도비(三田渡碑)에 페인트로 ‘철거’라고 낙서하는 등 훼손해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삼전도비는 조선시대 인조를 항복시킨 청나라의 전승비다.

구미=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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