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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44> 뜨끈한 맥주에 몸 담그고 마시는 맥주의 맛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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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톨메오 대성당에서 내려다 본 플젠 풍경.

성 바르톨메오 대성당에서 내려다 본 플젠 풍경.

온천욕 하며 술 마시기는 오래된 로망이었다. 무려 프뢰벨 동화책 술을 좋아하는 원숭이를 읽던 초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연 노천탕에 몸을 푹 담그고 볼이 빨개지도록 술을 홀짝이는 원숭이를 보며, 나도 어른이 되면 탕에서 술을 마셔야 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책장을 동화 전집으로 가득 채워준 어머니가 바란 교육 효과는 그게 아니었을 테지만 말이다. 원작자에게 누가 될까 한마디 덧붙인다. 동화는 나무에서 새끼를 떨어뜨린 원숭이와 원숭이를 구해준 한 아저씨의 따스한 우정을 담고 있다. 그 원숭이가 온천과 술을 좋아해, 원숭이와 친구가 된 아저씨도 온천에서 술 마시기를 좋아하게 된다. 

1842년 이래 같은 자리에서 맥주를 만들어온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 입구.

1842년 이래 같은 자리에서 맥주를 만들어온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 입구.

로망이 실현된 건 아주 뜻밖의 도시, 체코 플젠(Plzen)에서다. 수도 프라하에서 약 90 떨어진 플젠은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ell)이 태어난 곳이다. 필스너 우르켈은 전 세계 라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필스너 스타일 라거의 원조라 하겠다. 그만큼 유서 깊은 맥주의 도시 플젠에는 맥주 덕후들이 성지 순례하듯 찾는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 뿐 아니라 구시가가 중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맥주 맛을 돋우는 건강한 요리.

맥주 맛을 돋우는 건강한 요리.

플젠에선 식사 때마다 맥주를 곁들였다. 일행과 나는 매번 같은 필스너 우르켈을 마시면서도 그 신선한 맛과 보드라운 거품을 찬미했다. 맥주는 맛있고 우리는 즐거웠다. 단지, 점점 D라인이 돼가는 볼록한 배가 걱정스러워 부지런히 걸었다. 다행히 플젠 구시가는 지도가 없어도 금방 익숙해질 만큼 작았고, 걷기 좋은 길이 이어졌다. 

고딕 양식 건축의 정수, 성 바르톨메오 대성당.

고딕 양식 건축의 정수, 성 바르톨메오 대성당.

구시가의 중심 레푸블리키(Repibliky) 광장에 우뚝 선, 성 바르톨메오 성당 시계탑 꼭대기까지 301개의 계단을 오르기도 했다. 성 바르톨메오 대성당은 체코에서도 고딕양식이 빼어나기로 손꼽힌다.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150년에 걸쳐 지어 한 건물에 초·중·후기 고딕 양식이 모두 담겨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시계탑 높이 102.6m는 플젠 지하수의 깊이가 같다. 시계탑에서 고개를 내미니, 네모난 광장을 둘러싼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장난감 집처럼 아득히 내려다보였다. 이마와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목도 말랐다.

“자, 이제 비어 스파(Beer Spa)로 가볼까요?”   

푸르크미스트르 비어 스파에선 맥주를 푼 따뜻한 욕조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다.

푸르크미스트르 비어 스파에선 맥주를 푼 따뜻한 욕조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다.

때마침 가이드가 신기한 제안을 했다. 플젠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푸르크미스트르(Purkmistr)에 가면, 그냥 온천이 아니라 비어 스파를 즐길 수 있단다. 거 참 세계에서 개인 맥주 소비량이 가장 높은 나라다운 목욕 법 아닌가. 클레오파트라도 피부 관리를 위해 맥주 목욕을 하지 않았나. 맥주를 탄 목욕물을 마셔도 되냐. 마실 맥주는 따로 주지 않겠나. 일행들과 합리적 추론을 그거로 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푸르크미스트에 도착했다. 

“맥주부터 한잔 하시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푸르크미스트르 비어 스파는 원래 400여 년 전부터 에일 맥주를 만들어 온 소규모 양조장으로, 펍과 호텔까지 겸하고 있었다. 바이젠, 페일 에일, 다크 라거 등 맥주 종류만 50여 종에 달했다.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맛보고 싶어 샘플러를 주문했다. 양조장 옆 농장에서 직접 키운 닭, 오리 요리 등 맥주 맛을 돋워주는 메뉴도 풍성했다. 온천도 식후경. 믿을 수 있는 식재료로 만든 건강식에 맥주를 곁들이니 술술 넘어갔다. 

마침내 비어 스파에 입성했다. 효모가 살아있는 맥주에는 비타민, 미네랄 등이 다량 함유돼 있어 피부를 촉촉하게 해준다는 매니저의 설명을 듣는 내내 얼른 탕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1인실로 향했다. 안에는 맥주를 푼 따뜻한 물을 채운 나무 욕조가 놓여있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자, 은은한 효모 향이 온몸을 감쌌다. 욕조 옆 개인용 탭에선 시원한 생맥주가 콸콸 나왔다. 따끈한 맥주 탕에서 마시는 차가운 생맥주라니. 상상 이상의 호사였다. 몸은 뜨겁고, 속은 시원했다. 욕조를 나올 때 쯤엔 피부도 마음도 매끈매끈 여행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맥주 탕에서 마시니까 맥주가 더 잘 들어가요. 석 잔이나 마셨어요.”

푸르크미스트르 펍에서 맛볼 수 있는 신선한 수제 맥주.

푸르크미스트르 펍에서 맛볼 수 있는 신선한 수제 맥주.

한잔 더 마시려고 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나왔다는 일행은 마치 천국을 경험한 듯한 표정이었다. 어린 시절 동화 책 속 ‘술을 좋아하는 원숭이’에서 원숭이와 함께 온천을 즐기던 아저씨의 표정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내친김에 햇살 아래 딱 한 잔만 더 하기로 했다. 피부에 양보하기엔 맥주가 너무 맛있다는 게 핑계였다. 체코어로 건배, ‘나 즈드라비(Na zdravi, 건강을 위하여라는 뜻)’를 힘차게 외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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