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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내 목을 쳐라” 면암 최익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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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지난 일요일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3일’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주최 측 추산 150만 명이 모인 지난달 26일 광화문광장 집회에 나온 전남 흑산도 중학교 동창생들이었다. 60대 중반에 접어든 노신사들은 “울화통이 터져 주말마다 광장에서 만난다”고 했다. 시위 당일 고향에서 열린 친구들의 집회 장면도 스마트폰으로 보여주었다. 소셜 미디어는 그렇게 전국의 민의를 하나로 묶었다.

TV를 보며 지난 8월 말 들렀던 흑산도가 생각났다. 한국 해양생물학의 고전인 『자산어보(현산어보)』를 완성한 손암(巽庵) 정약전(1758~1816)의 자취를 찾아 나섰는데, 그곳에서 뜻밖의 ‘귀인’을 만났다. 면암(勉菴) 최익현(1833~1906)이다. 면암은 1876년 일제가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병자수호(강화도)조약에 반발해 “차라리 내 목을 먼저 쳐라”라며 광화문 앞에서 ‘도끼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 사건으로 절해고도 흑산도로 유형을 떠나게 됐다. 유배지에서도 서당을 열고 후학을 키우는 선비정신을 잊지 않았다.

면암은 조선 500년을 대표하는 정통 보수주의자다. 흑산도 천촌리 바위에 그가 직접 쓴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 여덟 자도 그렇다. ‘기봉’은 중국 기자가 봉한 땅, ‘홍무’는 중국 명나라 태조의 연호를 뜻한다. 유학자 면암의 사대주의 측면이 도마에 오르는 구실이 됐지만 이 땅, 이 나라가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충절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위정척사의 한계일 수 있다.

반면 면암은 원칙과 명분을 생명보다 아낀 보수의 아이콘이었다.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며 고종이 실권을 잡는 데 크게 기여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74세 고령에도 직접 의병을 일으켰다. 의거가 실패하며 일본 쓰시마(對馬島)로 끌려갔는데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하다가 결국 적지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를 기리는 흑산도 유허비(遺墟碑)는 현재 250년 된 소나무 보호수가 지키고 있다.

지난여름 흑산도를 안내했던 버스기사의 말이 기억난다. “순암, 면암 두 선생님 덕분에 흑산도가 빛난다. 자부심을 갖고 산다”고 했다. 벌써 한 달을 훌쩍 넘긴 ‘박근혜 게이트’, 한국 보수정치가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원칙을 내팽개친 권력과 그 앞에서 입을 굳게 다문 참모들을 꾸짖을 기운도 이제 거의 없다. “내 목을 쳐라”라던 140년 전의 당당한 외침에서 다시 힘을 내본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