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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절망이 희망인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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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정치부 기자

전수진
정치부 기자

독거총각 결혼추진회, 게으름뱅이연합, 고산병 연구회의 공통점은? 맞다. 지난 토요일 서울 광화문을 메운 190만 국민이 촛불과 함께 들고 나온 깃발에 적힌 모임 이름이다. 조금은 엉뚱하고 꽤나 유쾌한 이 깃발들은 집회에 으레 등장하기 마련인 전투적 깃발과는 사뭇 달랐다. 나라 상황이 얼마나 엄중하면 독거총각 결혼추진회가 황금 같은 토요일에 소개팅 대신 광화문에 출동했으며, 고산병 연구라는 숭고한 목적은 잠시 미루고 민의를 알리겠다고 나섰을까. 연합까지 만 드는 부지런함을 과시한 게으름뱅이연합엔 경의까지 표하고 싶을 정도다. 역시 지성이면 감천인지 흩날리던 눈발도 촛불 켜기 좋은 저녁 이 되니 딱 그쳤다.

여기에다 어떤 거친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LED 촛불은 머리띠형에 깃대형으로까지 진화했다. 집회 현장 곳곳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유머감각이 넘친다. 이번 집회가 일부 꾼들의 작전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단단한 민의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단면들이다.

아쉽지만 이번 토요일에도 게으름뱅이연합은 게으름을 피울 여유가 없을 듯 싶다. 독거총각들도, 고산병 연구자들도 각양각색 LED 촛불과 함께 광화문으로 향할 것이다. 박 대통령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했지만 그 ‘모든 것’이 대체 뭔지 국민은 어리둥절하다. 대통령의 변호인은 “여성으로서의 사생활” 운운했지만 국민에게도 지켜야 할 사생활이 있다. 언제까지 국민이 사생활은 반납하고 광장에 나와 집회에서 토요일을 불살라야 하는가.

절망의 한가운데에 있는 대한민국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찾아야 한다. 상황은 달라도 단초는 전후 일본을 참고해볼 만하다. 전후 일본에서 생긴 신조어, ‘허탈’이라는 뜻의 ‘교다쓰(虛脫)’가 그 힌트다. 미국 역사학자 존 다우어는 저서 『패배를 껴안고』에서 교다쓰가 일본이 새로 태어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전쟁 패배와 절망감이 일반 일본인들에게 오히려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2016년 대한민국의 교다쓰 역시 새로운 출발을 위한 뼈아픈 성장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참에 대한민국을 싹 청소할 수 있기를 조심스레 희망해 본다. 정치권을 보면 한숨만 나오지만 대한민국엔 190만이 평화롭게 시위를 벌이는 놀라운 국민이 있다. 오늘의 절망을 껴안고 내일의 희망으로 바꾸는 것도 이 나라 국민이라면 가능하다고 믿는다. 내일도 타오를 촛불은 이미 그 희망의 시작이다.

전수진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