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의 전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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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민당이 하루아침에 제1야당에서 원내교섭단체등록도 불가능한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2년 전 총선 직후 민한당에서 30명, 국민당 3명 등 35명의 의원입당으로 야당사에서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최대의 의석(1백2명) 을 기록하기도 했던 신민당.
85년 말 신보수회의 12명 탈당이 있었지만 그래도 90석의 제1야당을 자랑하던 신민당이 이제 10여 석을 간신히 유지해 허울만 남은 인상이다.
84년 11월 말 3차 해금과 함께 시작된 신민당의 창당과정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작업이었다.
흩어지면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민추·비민추 (주류·비주류) 가 50대50으로 모여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85년 1월18일 창당을 선언했지만 「동토선거」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원내교섭단체 (20명) 등록이 가능할 것이냐에 대해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던 불안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게 아니었다.
정치활동 규제로 4∼5년의 「낭인」 (?)생활 끝에 창당준비위원장과 초대 총재가 된 이민우씨는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 종노-중구에서 당선됐고 이른바 「신당 돌풍」이 불었던 것이다.
그렇게 출발했던 신민당이 26개 월 여만에 형해화하고 잔명을 유지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두 김씨가 당을 떠나던 날, 기자가 창당당시의 얘기를 하면서 소감을 묻자 이총재는 『지금의 심정이 총선 직전의 그 막연하고 불안했던 심정과 똑같다』 고 했다.전날 주류측의 최후통첩을 받고 낙미한 것으로 알려진 이총재의 이날 삼양동 회견은 처량하기까지 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날 하오에는 개현서명이다, 당사 봉쇄다 해서 개헌정국의 열기가 높았던 인의동 신민당 중앙당사에서 닷새 째 농성을 벌이던 충주지구당원들이 농성을 해제했다. 수 백 명이 닷새 째나 농성을 계속했던 탓인지 이들이 물러나간 당사에서는 악취가 났고 흩어진 집기들로 분위기는 한층 을씨년스러웠다.
신민당이 분당된 8일의 이런 풍경을 보면서 우리정치의 한계와 왜곡·굴절, 그리고 무엇보다 앞날의 정국에 대한 정체 모를 불안을 느끼는 것은 기자만의 과민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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