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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파브리병 앓는 부모 둔 자녀, 어릴 때부터 정기검사 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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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면

우리 몸은 끊임없는 대사 과정을 거친다. 흡수한 물질을 세포 구성 재료나 에너지로 쓰고 나머지는 몸 밖으로 배출한다. 이 중 어느 한 부분에 이상이 있어도 몸 전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유전질환인 파브리병(Fabry disease)이 그렇다. 국내에는 120명 정도밖에 없는 희귀질환이다. 치료제와 검사법이 있지만 조기 진단과 치료가 어려운 질환으로 꼽힌다.

세포에 당지질 찌꺼기 축적
기능 망가져 전신 질환 유발
효소대체요법으로 진행 억제

조기 진단 어려운 희귀질환

이름조차 생소한 파브리병. 이 질환은 아주 미세한 문제에서 시작된다. 우리 몸속 세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물질 중에 당지질이라는 것이 있다. 세포막을 구성하는 물질이다. 사용되고 남은 당지질은 몸의 대사 과정에 관여하는 ‘알파-갈락토시다제(alpha-galactosidase) A’라는 효소에 의해 분해·배출된다. 유전적으로 이 효소가 부족하거나 전혀 생산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분해돼야 할 당지질이 그대로 세포 안에 축적된다. 이런 상태가 바로 ‘파브리병’이다. 삼성서울병원 순환기내과 이상철 교수는 “파브리병은 ‘GL-3’라는 당지질의 찌꺼기가 세포에 쌓이게 되는 병”이라며 “이 축적된 당지질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심근비대증·신경통·신부전 원인

분해가 덜 된 당지질은 세포에 쌓이면서 세포의 기능을 망가뜨린다. 모든 세포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심장세포에 당지질이 축적되면 심장 근육의 부피가 커진다. 심장 벽은 점차 두꺼워지고 상대적으로 심장 안에 피를 담는 그릇의 크기는 줄어든다. 심장은 갈수록 무리하게 되고 점점 펌프질하는 힘이 떨어진다. 파브리병으로 인한 심근비대증이다. 이상철 교수는 “파브리병으로 심장에 문제가 생기면 심장 근육 자체가 뻑뻑해지고 잘 늘어나지 못해 심장 기능이 떨어진다”며 “제때 진단과 치료가 안 되면 심각한 심장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숨이 차거나 가슴이 답답하지만 심해지면 부정맥이나 심장마비까지 올 수 있다.

신경세포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이 교수는 “손발이 타는 듯한 통증이나 견디기 어려운 복통이 생기기도 하고, 눈 신경세포에서 시야를 뿌옇게 만들거나 신장세포에서는 신부전을 일으키는 주범이 된다. 장기적으로는 뇌졸중 위험이 높아진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장기 손상을 일으키기 전에 진단과 치료가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진단이 어렵다. 증상이 10~20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워낙 희귀질환이라 의심하기 쉽지 않아서다. 게다가 세포에 당지질이 천천히 누적되기 때문에 정작 장기 손상은 나중에 나타난다. 이 교수는 “파브리병은 발병 후 15 년 후에 진단된다는 말이 있다”며 “그만큼 발견하기 어려운 질환이어서 검사를 받아 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한국심초음파학회 조기 진단 사업

파브리병은 유전자 검사로 확진한다. 당지질 분해 효소를 만드는 GLA유전자 이상 유무를 확인하게 되는데 다행히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별검사가 있다. 혈액검사에서 ‘알파-갈락토시다제 A’ 효소 양을 측정해 이 병 유무를 알아볼 수 있다. 이 교수는 “보고된 환자는 적지만 발견되지 않은 환자를 포함하면 수천 명이 이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심전도·심장초음파 검사로 심근비대증이 의심되는 사람 중 파브리병 증상이 있는 사람은 선별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유전병인 만큼 가족 스크리닝 검사도 중요하다. X염색체 연관 유전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파브리병이면 딸에게만, 어머니가 환자면 아들·딸 모두에게 유전된다. 부모 중 한 명이라도 파브리병이 있으면 자식이 어렸을 때부터 이 병 진행 여부를 체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조기에 진단되면 치료는 비교적 간단하다. 체내에 결핍돼 있는 알파-갈락토시다제 A 효소를 공급해 주는 효소대체요법으로 치료한다. 완치는 아니지만 파브리병의 진행을 상당부분 억제할 수 있다.

조기진단이 그만큼 중요한 이유다. 현재 한국심초음파학회에서 파브리병 조기 진단 사업을 하고 있어 이 사업에 참여하거나 비후성심근증클리닉이 있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 보는 것이 좋다. 이 교수는 “2주에 한 번 정맥주사를 통해 치료한다”며 “빨리 진단해 치료할수록 당지질 축적을 억제해 장기 손상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류장훈 기자 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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