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교양] '유리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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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탑/고영리 지음, 전은이 옮김/이학사, 9천원

'유리탑'은 분량은 많지 않지만 자기를 분석하는 잣대가 냉정한 까닭에 독자를 움직이는 힘이 강력하다. 제목은 쉽게 부서질 것 같은 유리탑이나 책장을 덮고 나면 웬만한 강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철탑을 만난 듯하다.

저자 고영리는 필명이다. 본명은 김영자. 1922년 부산에서 태어나 세살 때 부모를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해방 이듬해 가족은 모두 귀국했으나 그만 일본에 남았다. 해방 두 달 전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던 일본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양녀라는 방편을 통해 국적도 일본으로 바꿨다. 집안은 가난했으나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 덕에 당시 교포 여성으론 극히 드물게 여대 중퇴라는 학력도 쌓았다.

'유리탑'은 정체성에 대한 책이다. 일본에서 성장한 고학력 재일교포 여성의 자아 찾기가 테마다. 일본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척받으며 살아야 했던 재일교포의 갈등이 축을 이룬다. 자기 한탄, 혹은 역경 극복 등이 쉽게 떠오른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한다. 한때 일본인이란 '가면'을 쓰고 일본인을 닮으려고 했던, 그래서 어려서부터 모국에 대한 열등감이 강했던 그가 '나라고 하는 주체적 존재'의 근원을 탐색해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게 펼쳐진다. 그는 일본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김희로씨의 구명 운동에도 관계했다.

책의 매력은 엄정한 자기 분석과 시대 진단이다. 그의 비극적 삶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해부한다. 특히 일본 사회의 시스템을 비수처럼 파고든다.

"야, 조센진! 조센 돼지야"란 놀림을 받고 컸던 그가 이번엔 반대로 일본 사회의 불합리한 체제를 통째로 뒤흔드는 것. 그렇다고 화풀이식 보복은 아니다.

'피가 얼어붙을 것 같은' 그의 체험을 바닥에 깔고 웬만한 과학자를 빰치는 객관적 태도로 일본의 허상을 도려낸다. 그것은 타민족에 대한 일본인의 절대적 배타주의,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절대 가치로 아는 '일본 밀교 신도들의 폐쇄 집단 사회'로 요약된다.

"지구상의 어디에도 타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고 그 가치를 부정하는 문화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 민중이 민주주의를 아무리 외쳐도, 그것은 우리 같은 이방인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전혀 무관하다" "일본인은 (패전의) 고통에 대해 갖가지 원망을 늘여놓지만 국가에 변칙적으로 동화돼 수동적 일면성만을 보인다" 등의 비판이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책 끝에 실린 소설 '기로'에는 이런 국가 시스템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자화상이 잘 나타나있다. 이식된 식물처럼 스스로 적응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단한 '타향살이'가 드러난다. 고씨는 주로 일본을 맹공하지만 그 메시지는 오늘날 지구촌에도 유효하다.

그는 "국가가 구분해놓은 지구상의 수많은 국경선이 나약한 개인을 얼마나 많이 유린해왔는가"고 묻는다. 국경에 의해 가정이 붕괴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 숱한 것이다.

또 "분단 반세기, 지금도 이산가족의 탄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그 비극의 배후에 대해 얼렁뚱땅 태만하게 넘어가는 일을 용납해선 안된다"고 다그친다. 올해도 어김없이 8.15가 바짝 다가왔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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