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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한류 드라마’가 된 ‘박·최 게이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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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이정헌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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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보다 더 잘 나가는 정치인이 있다. 지난 7월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64) 도쿄지사다. 1947년 도쿄지사 선거가 시작된 이후 69년 만에 유리 천장을 깬 첫 여성이다. 이달 초 마이니치신문 전국 여론조사에서 70%의 지지를 얻었다. 아베 내각의 지지율 48%를 뛰어넘었다. 지난달 산케이신문 조사에선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가 91.4%나 나왔다.

도쿄지사 선거 입후보 예정자들이 모인 7월 13일 기자회견장. 오랜 기간 몸담았던 자민당에 지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그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왜 입후보하려는 것이냐”는 물음에 고이케는 “가끔 여성이 도지사를 하면 좋겠다”고 답했다. 일본과 도쿄가 직면한 문제 대부분이 남성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남성은 안 되고 여성이 해야 좋다는 말이 아니라 시선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뜻”이라며 여성 리더십을 설명했다.

‘도쿄 대개혁’의 깃발을 치켜든 고이케 지사의 도정 원칙은 대의(大義)와 공감(共感)이다. “대의가 없는 정책은 정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의만 내세우면 공감을 얻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공감대가 형성돼야 좋은 정책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다. 불투명한 의사 결정을 통해 진행되던 쓰키지(築地)어시장 이전 계획부터 연기했다. 시장이 옮겨갈 도요스(豊洲) 부지가 화학가스 공장이 있던 곳으로 유해물질에 대한 대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은 점을 문제 삼았다.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 비용이 당초 예상의 네 배인 3조 엔(약 32조원)까지 부풀려진 것도 발견해 경기장 재검토를 선언했다. 대의가 있다고 판단되면 도민에게 적극 설명하고 밀어붙였다.

도지사 급여를 절반으로 삭감한 ‘셀프 개혁’은 공감을 위한 첫걸음이다. 월급과 수당을 합해 연간 2896만 엔(약 3억1000만원)에 이르던 급여를 1448만 엔(약 1억5500만원)으로 줄였다. 포퓰리즘이란 비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정치자금을 유용하다 낙마한 전임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지사와 대조를 이루며 민심을 파고들었다. 고이케는 최근 일본 잡지 ‘프레지던트’ 인터뷰에서 “확실하게 개혁을 이루기 위해선 높은 수준의 투명성·공정성을 담보해야 한다. 스스로 뼈를 깎는 각오와 자세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2012년 한국에서도 유리 천장이 깨졌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 브랜드에 속은 유권자들은 51.6%의 표를 안겨줬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삶을 어머니처럼 꼼꼼하게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청와대 구중궁궐에 몸을 숨긴 채 그가 챙긴 건 국민이 아니라 최순실 일가였다. 지지율은 5%까지 떨어졌다. 일본 언론은 연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막장 한류 드라마’라고 비웃으며 보도하고 있다. 일본인들과 함께 TV를 보기가 두렵고 창피할 정도다. 고이케의 ‘공감 리더십’을 지켜보며 잘못된 선택으로 추락한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이 정 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