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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감은커녕 반면교사가 되어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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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베이징 총국장

“이런 감사를 왜 하는 거죠?” 중국인 영상기자가 대뜸 물었다. 지난달 주중 대사관에 대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국정감사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질문인지 억지 주장인지 모를 장광설을 늘어놓고는 “시간 없으니 대답할 필요 없다”며 답변자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의원, 물에 물 탄 듯 알맹이 없는 대답으로 어물쩍 넘어가는 답변자…. 내가 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삼권분립과는 동떨어진 제도 아래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의 눈엔 오죽하랴 싶었다.

그래도 한마디 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이런 절차라도 있으니 정부가 잘못하는 일이 없나 국민이 감시하고 밝혀 낼 수도 있는 거야. 쓸데없는 일처럼 보여도 없는 것보단 낫잖아. 민주주의란 건 원래 그런 거야.” 말을 하다 보니 마치 초등학생에게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되어 버렸다. 그는 아무 반론도 하지 않았다. 그 영상기자가 얼마 전 한국 국내 뉴스를 골몰하게 들여다보더니 불쑥 이런 말을 내게 던졌다. “중국엔 국정감사도 없지만 적어도 이런 지도자는 나오지 않잖아요.” 이번엔 내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끝난 미국의 대통령선거엔 중국인들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누가 당선되느냐가 시중의 최고 관심사였지만 중국 관영매체들의 보도는 좀 달랐다. 그들은 공정한 절차와 경쟁을 통한 후보자 선출 과정이나 정책 논쟁, TV 토론, 자유로운 정견 표명 등의 선거운동 과정에 대해서는 보도를 생략했다. 대신 집중 부각한 것은 선거 혼탁과 진흙탕 싸움 등 부정적인 측면 일색이었다. 인민일보는 3면 머리기사로 “미국 대선은 돈싸움과 떠들썩한 한바탕 쇼(?劇)에 불과하다. 미국 국민조차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고 썼다. “아무렴, 우리 것이 제일 좋은 것이여”란 자신감이 행간에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안간힘을 다해 서구식 민주주의 사조가 유입되는 것을 막고 중국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시진핑(習近平) 체제에 이보다 더 좋은 소재는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때마침 한국에선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피의자로 추락하는 사태까지 이르렀으니 호재가 겹친 격일까.

중국인들이 이런 상황을 흥미거리로만 보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얼마 전 새삼 느꼈다. 한 중견 언론인을 만나고 나서다. 중국 유수의 일간지에 논설을 쓰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도 자유파(自由派)라 불리는 일군의 지식인들이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는 정치개혁론자들을 말한다. 한때 중국 지도자 가운데도 공공연히 정치개혁을 얘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자유파의 활동이 계속 위축되고 있다. 그들의 입지가 튼튼해지기 위해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최근 한국이나 미국의 상황을 보면 그들이 어디 가서 말이나 제대로 할까 싶다. 지금 중국인에게 한국은 민주주의의 귀감은커녕 반면교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예 영 준
베이징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