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KBS 3·1절 특집 드라마 『종이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또 한번의 3.1절이 지났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우리는 으레 일제식민지 36년간의 아픔과 그에 따른 민족의 항거를 3. 1만세운동을 통해 집약적으로 상기해낸다.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될, 그러나 실제로는 잊고 있는 그때의 증오가 삽시간에 복활하고 또 삽시간에 망각 속으로 묻혀 가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불행하게도 우리는 과거를, 과거의 망령을 증오의 표적으로 삼아온 것이 아닐까. 우리가 과거 속으로 들어가 잠깐동안의 의무처럼 분노하는 그때 우리 등뒤에서 웃고 있는 오늘의 일본을 잊고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그들의 침략은 그때보다 더욱 교묘하고 잔인하며, 오늘날 우리들의 의식무장은 그때보다 더욱 어리석고 무디다.
이 같은 점에서 볼 때 KBS 제1TV가 28일 밤 방영한 3. 1절 특집극 『종이학』(김용성원 작·장형일 연출)은 날카롭고 신선한 드라마였다. 갈수록 초라한 연례행사처럼 변해가고 있는 TV의 3·1절 특집에서 이만한 드라마를 발견해 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에 가깝다.
한국관광에 나선 4O대 일본인사업가 「이케다」와 그의 관광안내 맡은 30대 한국인 청년 송남규,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처음 와본 20대 일본인 처녀 「유키코」등을 통해 오늘날 한일관계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 『종이학』은 자국의 만행에 대해 자책감을 갖고있는(눈물까지 흘리는), 그러나 그 같은 자책감마저 간교한 상술로 이용하고 있는 일본인의 이중인격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
3·1운동의 상징적 전신인 논개의 정절을 사모, 일본에 사당까지 지어놓고 촉석루에 와서 1천 마리 가짜 종이학을 뿌리며 「논개님」을 제사지내는 「이케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유명한 뱀탕집을 찾아다니고 기생과 정사를 벌이는 등 극이 진행될수록 서서히 본심을 드러낸다. 급기야 「논개인지 뭔지 하는 계집」을 이용해 일본에 장수곱돌을 밀반출 하려는 등 불법사업을 벌이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사실이 「유키코」에게까지 탄로 나고 만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초점은 「이케다」가 아닌 한국인을 향해 은밀하게 겨냥돼있다. 「이케다」의 거짓 뉘우침에 감지덕지하는 조 부장·박씨 따위의 한국인은 누구인가. 아니, 「이케다」의 거짓 뉘우침의 속셈을 낱낱이 알고 있으면서도 공모의 악수를 나누는 한국인은 누구인가. 『종이학』은 질문을 던진다.
가라오케와 왜식집이 즐비한 1987년 한국에 사는 우리들 모두에게 『종이학』은 결코 격앙되지 않은 목소리로 꾸짖는다.
기동성 있는 촬영과 정교한 구성을 전개해나간 신중한 연출은 「이케다」가 종이학을 강물에 뿌리는 장면에서 압권을 이루었고 임동진·임혁주의 연기력 또한 탁월했다. 다만 아버지세대의 교활함에 경악한 전후세대 「유키코」와 분노를 간직한 청년 송남규의 작위적 화해가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손상시킨 것이 흠이었지만 『종이학』이 겨냥하고있는 것이 오늘날 한일관계의 「해답」이 아닌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관대한 평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일제통치 36년을 잊을 수는 없다. 잊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 속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을 때 일본은 등뒤에 서있다. 오늘날의 일본과 손잡기 위해 과거의 일본만을 경계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의도적인 제스처는 죄악이다. <기형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