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치없이 대학발전없다. - 세유정론 홍원탁<서울대교수. 경제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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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년초 미국 문부성이 교육제도의 대폭적인 개혁이 없으면 2류국이 될것이라고 미국국민들에게 회종을 울리기 위해 발표한 『오늘날의 일본교육』이란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의 초등·중등교육은 일본에 견주어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열등한 것 같다. 단지일본이 미국을 못따라가고 있는 부문은 대학교육이라 한다.
즉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초·중등 과정에서는 일본이 성공했지만 창의와 다양성이 요구되는 대학과정에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한데 바로 얼마전에 필자는 이「실패작」이라는 일본대학 중의하나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경제학과가 들어 있는 7층건물에 들어가 보니 건물의 절반 가량을 도서관 시설과 서고가 차지하고 있었다.
경제학분야 연구에 필요한 자료가 거의 다 비치되어 있는 것 같이 보였으나 혹시 없는 자료는 담당 사서에게 부탁만 해두면 전국적인 도서관 자료망을 통해 단시일 내에 사본을 만들어준다. 때문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그 경제학과 건물 밖으로 나갈 필요없이 교수들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고 학생들 또한 자연스럽게 그와같은 학구적 분위기에 젖어들게 되는 것 같다.
이「실패작」의 하나라는 대학을 둘러보고 한국의 대학을 생각해 보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필자도 대학원 과정은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그 흔한 사람들 중의 하나인데 요즘에도 유학 당시의 생활이 자주머리에 떠오른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가 주가에 둘러싸인 책상 위에 가방을 풀어놓고 필요한 책들을 찾아다 잔뜩 쌓아놓으면 그날 하루 종일의 보금자리가 된다.
필자가 지금 회상해 보는 그분위기는 유학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 내 전공분야에 속하는 주제로 석사논문을 써보겠다고 찾아온 학생에게 몇가지 관련 서적 이름을 가르쳐주고 읽어오라고 했다. 며칠 후 그 학생이 다시와서 하는 말이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의 그 유일한 중앙도서관이란 곳에 내가 보라고한 책들이 한권도 없으니 이제 어디를 가보아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도 불쑥 화가 나서 그 학생에게 왜 외국유학을 안가고 여기서 대학원 공부를 한다고 청승을 떨고 있느냐고 야단을 쳤지만 곧 아주 참혹한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우리 대학이 이꼴로 있어야하고, 언제까지 우리 학생들이 설움의 에너지를 무한한 학문의 세계에서 발산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방황해야 할것인가 답답할 뿐이지만 우리나라 대학교육을 장악하고 있는 문교당국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대학교육 현실의 취약성을 통감하게된 서울대학교는 작년에 교수들의 중지를 모아 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최우선순위 사업으로 두개의 분야별 도서관설립착공에 필요한 비용 20억원 가량을 예산권을 쥐고있는 문교부에 신청했으나 보기 좋게 묵살당했다. 놀라운 사실은 문교부에서 대학교육을 담당하고 있다는 분들이 분야별 도서관의 필요성은 커녕 도서관이란 건물을 지어놓으면 그속에 어떤 시설과 서비스시스템이 들어가야 하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런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공식적인 예산배정 거부 이유는 서울대학교만 특별 취급해 줄 수는 없고 전국 대학에 모두 동시에 해주자니 그 큰돈을 염출 할만한 재정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른다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전국 모든 대학이 한날 한시에 똑같은 혜택을 볼 수 있기전에는 한가지도 할수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세상에 도대체 어느 정부가 이런식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지 알길이 없다.
어쩌면 이런 얘기는 교수재임용·정원책정·입시제도등 우리나라 대학교육에 대한 문교행정이 안고있는 숱한 문제들 중에 아주 하찮은 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국립대 직원들이 모두 문교부가 인사권을 쥐고있는 사람들이라 교수 중심으로 대학을 운영한다는 것이 불가능한것 같다고 말할라치면 사립대 교수들은 도대체 온갖 세세한 문제에 대한 문교부의 납득할 수 없는 규제들 때문에 아무일도 못하겠다고 한술 더 뜬다.
이제 우리 국민과 정부는 현재 대학교육을 총괄하고 있는 수십명의 문교당국자들이 과연 우리나라의 고등교육과 학문발전을 전담하고 지휘할 자격을 갖추고있는지 엄밀히 검토해보아야 한다. 만약 그럴 능력이 없다고 판정되면 대학교육을 전면적으로 자치화해야 할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 대학교육이 문교부의 직접통치를 벗어나 대학스스로가 모든 학사문제를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된다면 2000년대가 시작될 때쯤 우리나라는 가장 선진적인 고등교육 시스템을 갖게되고 학문의 수준도 놀랍게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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