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우량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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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고려의 「우량기」 가 발견되었다. 정우 2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사용된 것이라는 명문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그 해는 서기 1214년 고려 고종 원년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측우기로 가장 오랜 것이 1441년 조선 세종23년의 것이니까 무려 2백28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게 국제적 공인을 받게되면 세계 최고의 원통형 측우기가 된다.
눈앞에 고려 우량기를 놓고도 믿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과연 그 시대에 그런 과학기기를 만들어 썼을까 하는 의구 때문이다.
실제 조선 초에도 비의 양을 정확히 재지 못해 고심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5년(1423년) 5월3일에도 『오늘밤 비가 내렸다. 땅 속에 스며들기를 1촌 가량』 이라고 적고 있다.
또 세종7년 4월1일에도 『지금 가물어 각도와 군현에 명하여 빗물이 땅 속에 스며든 정도를 조사하여 보고케 했다』 는 기록이 나온다.
그 당시만 해도 「빗물이. 땅속에 스며든 정도」 를 재는 단계였다.
그러니까 땅이 말랐을 때와 젖었을 때에 따라 땅 속에 스미는 빗물의 깊이가 같을 수가 없다.
가뭄과 큰비가 번갈아 기슴을 부리면 강우량 측정은 불가능해진다. 그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측우기다.
『세종실록』 에는 1441년에 『서운관에 대를 만들고 길이 2자, 지름 8치의 철기를 주조하여 대위에 놓고 빗물을 받아 그 깊이를 쟀다』 는 기록이 나온다.
그 기기에 곧 『우기」 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 다음 해였다.
그 기발한 기기가 중국의 발명을 흉내낸 것이 아니고 우리의 독자적 발명이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 아이디어의 제공자는 세종의 아들 문종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농업기상학의 수준을 설명하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세종시대의 과학자들이 하천의 수량을 재는 수표를 발명, 사용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전승된 우리의 과학적 예지의 소견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발견된 고려 우량기도 그 하나의 증거다. 확실한 우량 측정 기록이 없어 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한국인의 창조적 과학전통을 다시 생각게 하는 자료임엔 틀림없다.
신라에 첨성대가 있었고, 고려에 이미 서운관이 있어 각종 천문 관측을 했었던 것으로도 고려 우량기의 출현은 아주 낯선 것만도 아닌 것 같다.
그 진부를 가려 한국인의 창조적 과학정신을 계승하는 노력이 새삼 아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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