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유럽 황금기 원동력은 집단이 아닌 ‘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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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개인의 탄생
래리 시덴톱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588쪽, 2만5000원

개인의 가치와 자율성에 대한 존중은 근대성의 표상이다. 가족의 종속물이나 집단의 공유물이던 개인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적·제도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세계와 역사발전의 주체가 됐다. 이는 평등주의와 자유주의의 토대를 이룬다. 이를 통해 비로소 제한 없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출신의 영국 옥스퍼드대 정치학 교수인 지은이는 개인을 중심에 둔 자유주의와 평등주의가 오늘날 현대 인류문명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고 주장한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 과학, 예술, 문화, 경제 등 서구의 발전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오늘날 문명을 만든 원동력은 인간의 이러한 창조성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지은이에 따르면 ‘개인’이란 개념이 근대 태동기 서양에서 ‘발명’된 것으로 기독교의 평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프랑스에서 개인이란 단어는 15세기가 돼서야 비로소 등장한다는 사실이 그 근거의 하나다. 지은이는 국가 주권이 조건인 ‘국가’라는 단어와 비슷한 시기에 이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것이 우연이 아닌 이유는 두 개념이 역사적으로 서로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국가 안에서 최고의 역할을 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발명됐다는 설명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자신을 먼저 발견하지 않고는 신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했다. [중앙포토]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자신을 먼저 발견하지 않고는 신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했다. [중앙포토]

지은이는 개인이란 기독교의 ‘영혼’ 개념을 세속적으로 바꿔놓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영혼은 공유물일 수 없으며 절대적으로 개인의 것이다. 이런 개념의 발명을 통해 기독교 평등주의는 사회적 신분의 철폐와 개인이 세상을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이에 따라 현대를 풍미하는 ‘시민사회’라는 개념의 뿌리도 개인의 발명에서 비롯된다는 해석이다.

지은이는 오늘날 서양사회가 이런 당당한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 바람에 도덕적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자신의 신념체계와 가치기준이 혼란스러우니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고 미래에 대한 신념도 상실한 상태라고 평가한다. 오늘날 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서양식 사고방식과 민주주의로 상징되는 사회구조가 전 세계 곳곳에서 도전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적사회와 사적사회를 뚜렷이 구분하고 개인의 양심과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와 평등의 사회는 그 합리성 때문에 이런 도전을 극복하고 계속 생존할 수밖에 없다는 게 지은이의 믿음이다.

[S BOX] 이슬람 근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이란성 쌍둥이

지은이는 현대에 들어 자유주의와 평등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고 진단한다. 종교법이 세속을 지배하고 여성들에게 예종의 길을 강요하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고개를 드는 것이 한 예다. 이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의 가치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실패한 마르크스주의가 유사 자본주의로 변질하고 있는 중국도 또 다른 도전 사례로 지목한다. 중국 공산당이 내세우는 통치 이데올로기는 다수의 이익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는 어설픈 공리주의일 뿐이라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이러한 중국식 실용주의가 서양에서 절대가치로 여기는 정의나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근거로 악용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 정치적 자유와 인권은 어느 정도 포기해도 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절대 가치를 돈으로 바꿀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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