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부 밝히는 백서<김수길 경제부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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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요즈음엔 참 「의혹사건」 이란 꼬리가 불을만한 큰 일들이 많다.
박종철군 사건을 비롯하여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대전 성지원의 신민당의원 폭행사건 등등.
그 중에는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식으로 자칫 영원히 어처구니없는 「의혹사건」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하다가, 여전히 미심쩍은 앙금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이 밝혀진 사건도 있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의혹을 풀어가야 할 사건도 있다.
과거 큰 희생을 치르고 「워터게이트」 사건의 매듭을 풀었던 미국이 요즘 다시 「이란게이트」 사건을 풀어가고 있는 과정은 우리로선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최근 경제기획원이 펴낸 「건설공사 제도개선 및 부실대책」 이라는 4백37페이지 짜리 장문의 보고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돋보이는 책이다.
건설업계의 부조리는 매우 뿌리깊고 구조적인 것으로 누구도 쉽게 손을 댈수 없는 「복마전」 과 같이 방치되어 온 것이 사실인데, 경제기획원은 이번에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낱낱이 밝히고 그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제시해 놓았다.
돋보이는 것은 보고서에 제시된 「대책」 이라기보다 정부 스스로의 입을 통해 파헤쳐진 갖가지 부조리「사례」들 쪽이다.
감춰졌던 지난 일을 다시 들추어야만 속이 시원하겠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목동 아파트의 주요 설계 변경이 45건이나 있었고 실시 설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중부고속도로가 착공되었다는 등의 「치부」 까지도 그대로 파헤친 「솔직함」과「용기」가 돋보인다는 뜻이다.
이 정도의 보고서라면 미 의회청문회의 기록에 비길 만하고, 영국정부의 공식보고서 표지가 흰색이었다는 데서 유래한 「백서」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박종철군 사건을 계기로 설치된 정부 내 인권특위의 앞으로의 활동보다 독립기념관 화재사건을 계기로 제시된 이번 종합대책의 실효성에 일단 더욱 믿음이 가는 것은, 이번 「건설부조리 백서」가 낱낱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과거의 「잘못」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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