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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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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2일은 음력 정월 대보름 .새해들어 첫 만월을 보는 날이다.
이날은 설날부터 시작되는 수세명절의 마지막 날인 동시에 한해 농사의 시점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고대 농경사회에서의 달은 고마운 존재였다. 그래서 우리네 옛 풍습에는 보름날 만월에 얽힌 민속이 많으며, 그 민속의 대부분은 농사와 연관이 있다.
보름달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정월 대보름. 그 둥근 대보름 달을 보며 한해 농사를 미리 점쳤다.
『동국세시기』를 보면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흐리면 흉년이 든다. 달빛이 희면 비가 많이 오고, 붉으면 가뭄이 온다 .또 달이 남으로 치우치면 해변에 풍년이 들 징조고, 북으로 치우치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
그러나 대보름의 품속도 이젠 대부분 사라졌다 .그저 오곡밥을 지어먹거나 부럼을 깨무는 게 고작이다.
부렴은 대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밤 ,호두 ,은행 ,갓, 땅콩 등을 껍질째 깨무는 풍속. 대개 자기 나이 수대로 깨무는데, 여러 번 깨무는 것보다 단번에 깨무는 것이 좋다. 깨물 때는 『1년 열 두달 무사태평하고 부스럼 나지 맙시사』 라고 기원한다.
그러고 보면 「부럼」은 「부스렴」에서 나온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월에 웬 부스럼 걱정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굳히 (고치방), 즉 흔들리는 이를 단단히 하는 처방과 관련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렇게 깨문 부럼은 첫 번째 것은 마당에 버리고 다음 것은 껍질을 벗겨 먹었다.
부럼을 위해 주부들은 미리 땅속에 묻어두었던 밤을 파내 깨끗이 씻어 둔다. 그러나 요즘 시속은 시장이나 백화점에 준비해 놓은 「부럼용」을 사다 쓰는 게 고작이지만 그나마 없는 것보다 낫다.
이밖에 귀밝이술 (이명주)이라 하여 청주 한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는 풍속도 있었고 ,약식을 먹기도 했다.
『삼국사기』엔 이런 고사가 있다 .신라 인대 소지왕이 어느 날 천천사에 갔더니 쥐와 까마귀가 와서 울며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라고 했다. 그래 남촌에 이르니 한 노인이 나와 봉서를 하나 주었다 .받아본 즉 「개견이인사 부개견일인사」라 적혀 있었다 .봉투를 열면 2명이 죽고, 안 열면 1명이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왕이뜯어보니 『금갑 을 쏘아라』 라는 글이 나봤다. 왕이 궁중에 돌아와 금갑을 쏘니 그 안에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 2명이 밀회를 하고 있었다. 약식은 그 까마귀에게 보답하는 먹이였다.
이런 대보름의 아름다운 풍속도 이제는 남의 것처럼 어설프게 여기는 세상이 되었다. 그만큼 「신식」이 되었는지 ,아니면 세태가 각박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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