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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장애인 보청犬 기르는 '멍멍이 엄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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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꼭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려야만 화가가 아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함으로써 소외된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아름다운 색깔을 입히는 진정한 화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화가의 꿈을 접은 채 장애인들을 위해 '개 엄마'로 살고 있는 이혜원(29)씨는 우리 시대 '진짜 화가' 중 한명이다. 李씨는 벌써 6년째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삼성카드 도우미견(犬)센터에서 훈련사로 일하고 있다.

경기대 미대에 다니던 李씨가 도우미견센터의 문을 두드린 것은 1996년. 어려서부터 가족들로부터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버려진 개나 고양이, 심지어는 병아리까지 주워다 기를 정도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했던 李씨였지만 막상 개를 훈련시키는 직업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시각장애인 안내견 '퍼피 워커(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개를 맡아 기르며 사회화 교육을 시키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도우미견센터를 찾았다가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직원으로 채용해줄 수 없느냐고 물었죠. 그런데 운명이었는지 그 때가 마침 신입사원 모집기간이더라고요. 얼떨결에 원서를 냈고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고 개들 옆에 '주저앉게' 된 거죠."

입사 이후 李씨에게 주어진 일은 안내견을 번식시키는 일.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돼야 하는 개들인 만큼 혈통까지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신경쓰이는 작업이 아니었다. 게다가 공들여 받은 강아지를 며칠 만에 퍼피 워커들에게 보내야 할 때면 번번이 '생이별의 아픔'을 느껴야 했다.

"6년 동안 강아지 1백80여 마리를 받아냈죠. 그 중엔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는 개들도 있지만 연락이 끊긴 쪽이 더 많아요. 그 녀석들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죠. 그래도 어디선가 장애인들을 돕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자식 잘 기른 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뿌듯해요."

이런 李씨가 지난해부터 새롭게 온 정열을 쏟고 있는 일은 보청견(補聽犬) 훈련. 보청견이란 청각장애인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자명종.초인종.화재경보 등의 소리를 인식시켜주는 개. 국내에는 생소하지만 장애인 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선진국에선 이미 일반화한 도우미견 중 하나다.

"보청견은 자신이 아는 소리를 들으면 먼저 주인을 건드린 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는 훈련을 받지요. 그러다 보니 생활에 필요한 소리를 구분할 수 있도록 반복학습하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아예 아파트를 한채 빌려 같이 살다시피 하면서 하나하나 가르치고 있어요."

지난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최고의 보청견 양성기관인 NEADS(National Education of Asistance Dog Services)에서 연수, 자격증을 따 '국내 보청견 훈련사 1호'가 된 李씨가 지금까지 분양한 보청견은 '소리' 한 마리. '소리'는 전남대에 다니는 한 청각장애 학생 곁에서 생활의 불편을 해소해주고 있다. 현재는 모두 8마리를 동시에 훈련시키고 있다.

직장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집에서도 동물보호단체로부터 버려진 개들을 위탁받아 기르고 있다는 李씨. 그는 "보청견을 데려간 분들이 '예전에는 외출했던 가족이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듣지 못해 문 밖에 세워두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다'며 기뻐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며 "더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보청견을 기르겠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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