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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태도」보다 「성실한 언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사람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화제에 오르기도 한다. 화제에 오른 사람의 지명도가 높을수록 평가의 도마 위에 오르기 쉽거니와, 널리 알려진 대학교수 가운데『태도가 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 사람이 종종 있다.
평소에는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 꽤 신랄한 비판을 하더니 때로는 정부에 유리한 발언도 하는 것은 「태도가 선명하지 못한」대표적 경우의 하나라는 것이다.
태도가 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말을 많이 듣는 어느 교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말문을 열자마자 근자에 정부가 한 어떤 처사에 대하여 익살 섞인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이런 말 저런 말하는 가운데 이번에는 일부 학생들의 과격한 행동을 꾸짖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의 논지는 명백했고 그의 태도는 솔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명하지 않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도대체 그가 누구의 편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정반대의 극을 향하여 치닫는 두줄기 강한 흐름이 있다. 그들의 높은 목소리와 무거운 압력에 눌려서 자유와 상식을 사랑하는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운 실정이다. 말끝마다 민주주의를 들먹이는 나라에서 어찌하여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두 가치의 주장이 극단적으로 대립할때 그 주장의 지지자들은 각각 자기네가 옳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네의 주장에 동조할 것을 호소한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호소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호소를 정당화는 것은 그 말과 호소를 뒷받침하는 논리에 있으며, 목소리의 크기나 말 뒤에 도사린 권력이나 세력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양극으로 대립한 두 세력 가운데 어느 한편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완전무결함이 밝혀졌다면, 우리는 응당 그 옳은 편을 지지함에 있어서 추호의 보류도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 일반에 관한 대립에 있어서 어느 한편이 완전하게 옳다는 것을 충분한 근거도 없이 가렵게 전제할 수는 없다. 대립된 두 진영이나 주장에 모두 잘못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며, 양극의 어느 편도 아닌 제3의 길이 더욱 바람직할지 모른다는 가능성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길이 가장 바람직하냐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소망과 의사를 반영하고 내려져야 한다. 힘이 강하거나 목소리가 높은 일부 사람들뿐 아니라 어떤 패거리에도 휩쓸리기를 원치 않으며 묵묵히 살아가는 일반 대중의 소망과 의사도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다.
국가나 사회에도 올바른 길이 있고 그릇된 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 올바른 길이 고속도로처럼 뚫려 있거나 수학 문제의 해답처럼 명료하다면, 우리는 추호의 주저나 보류도 없이 그 길로 달러가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 또는 사회에 관한 문제는 국민학교의 산수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앞으로 우리 한국이 가야할 바른길은 이미 건설된 고속도로처럼 뚫려 있는 것도 아니며 산수의 답안처럼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길은 우리가 앞으로 지혜를 모아 찾아야 할 길이며, 힘을 합해서 뚫어야 할 길이다. 그 길을 찾는 과정에 있어서는 진지하고 냉철한 이론적 탐구와 대화가 있어야 할 것이며, 그 길을 뚫는 과정에 있어서는 우리한국의 현실과 한국인의 의식수준의 제약에서 오는 시행착오도 불가피할 것이다.
우리 한국이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모든 한국인의 행 불행이 달려있다. 따라서 이 길을 찾고 이 길을 뚫는 일에는 우리 모두가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가졌다. 여기에 있어서는 누구의 독선이나 독단도 허용될 수 없다. 나라에 대한 사랑은 아무도 독점할 수 없는 바 만인의 공동 관심사다.
약삭빠른 이해타산에서 오는 대도의 불투명은 마땅히 지탄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양극 어느 편에도 믿음이 가지 않아서 동참을 거부하는 것은 자유인의 당연한 태도이며, 진정 어느 길이 옳은지 몰라서 태도의 표명을 보류하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한 겸손한 망설임이다.
사람의 인격을 평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은 그 태도의 선명도가 아니라 그 말과 행동의 성실성이다. 김태길<전 서울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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