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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세 겹의 물결이 배 안으로 닥쳐 들어와 배가 쪼개지니 선창에 누워있던 사람들은 나올 사이 없이 익사하고, 갑판 위에 있던 몇 사람은 바다로 뛰어내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결에 휩쓸려 가버렸다』유명한 『하멜 표류기』의 조난 장면이다.
1653년 7월 네덜란드 배 스펠웰호가 제주도에 표착, 64명의 선원 중 36명만이 살아남은 이야기다.
「하멜」이 쓴 그 책의 원제목은 『난선 제주도 난파기』로 14년간 조선에 억류된 후 탈출하여 유럽에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소개한 공헌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 최박의 표류기인 『표해록』도 있다.
1488년 제주도에서 중국의 절강성 해안까지 29일간 표류했던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표류 사실 기록으로 가장 오랜 것은 아마도 『삼국유사』에 나오는 장춘의 기록이다.
신라인 장춘은 해상을 나갔다가 돌개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진 후 혼자서 널판쪽을 잡고 오나라에 닿았다고 한다.
그때 그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사경을 넘은 과정은 넉넉히 상상된다.
표류 세계 최장기록은 1942년 영국 상선 댄 르몽드호의 중국인 선원 「판·린」의 1백33일이다.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표류의 실제 기록은 아니지만 꿈 많은 소년·소녀들의 모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실제 해난사고나 표류는 그처럼 아름다운 이야깃거리는 아니다.
1976년 전남 완도에서 거룻배를 타고 밤낚시를 나갔던 15세의 황인경군은 깜박 조는 사이 배가 망망대해로 나가는 바람에 6일 동안 표류했다.
그는 물 한모금 못 마시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나일론 셔츠만 입은 채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야했다.
1977년에는 적도부근 해상에서 참치잡이하다 침몰한 남해208호 선원 l8명중 8명이 구명정에 탄채 10일 동안 표류한 기록도 있다.
이들은 구명정에 괴는 빗물을 받아 마시며 마지막 남은 껌을 뱉지 못하고 그대로 삼켰다. 그들이 구조됐을 때 얼굴은 적도의 뜨거운 햇볕에 심하게 화상을 입고 있었다.
제7해풍호 선원 26명중 9명이 조난 5일만에 일본연안에서 구조되었다.
하루에 성냥갑 만한 건빵 1개를 먹으며 소나기에 젖은 내복을 벗어 물을 빨아 마셨다. 추위와 허기를 참으며 『잠들면 죽는다』고 서로 꼬집기도 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그들은 『하느님, 살려주십시오』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천우신조랄까, 마침내 그들은 살아 돌아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살려는 의지는 하늘마저 움직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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