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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판은 신나는 놀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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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점퍼가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여름에 걸치면 시원하고, 겨울에 입으면 따뜻하고, 오토바이 탈 때 바람 막아주고, 입으면 폼나고…. 뭐 또 없나? 하여튼 가죽점퍼 하나면 다른 옷 필요 없어요. 그런데 왜들 벗으라고 난리지?”

가죽점퍼의 유용성을 10분째 설명하고 있는 이 남자, 역시나 한 여름 실내에서 점퍼 벗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곳은 서울 역삼동의 한 지하 연극 연습실.

다른 배우들은 노래 연습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데 이 남자만 유독 가죽점퍼를 입은 채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이대로 앉아서 이런 궁리 저런 궁리를 잔뜩 하다가 연습이 끝나면 1천5백㏄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지는 남자, 연출가 박승걸(31)이다.

이쯤에서 그가 괴짜에다 '날라리' 연출가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해다. 그간의 성적표가 이를 입증한다. 그는 3년째 인기몰이를 해온 연극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쟁이'의 연출자다.

'백설공주…'는 박씨가 1996년 인터넷에 떠돌던 글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일곱 난쟁이 중 말을 못하는 반달이가 계모를 피해 숲으로 들어온 백설공주를 사랑하게 돼 아낌없이 헌신한다는 내용이다.

그간 17만명이 넘는 관객이 이 연극을 봤다. 인형.천을 활용한 놀이적 기법으로 어린이 관객을, 슬픈 사랑이야기로 어른 관객을 포획했다. 엄청난 입소문은 든든한 원군이었다.

일약 연극 한편으로 유명해진 그가 "다음 작품은 전혀 새로운 것"이라고 천명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도 그 연장선상의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전작처럼 아름답고 여운이 긴 이야기, '나무를 심은 사람'(8월29일~10월 5일, 유시어터)이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원작이다. 프랑스의 한 고원지대의 황무지에 수십년간 나무를 심어온 한 남자(엘제아르 부피에)에 관한 이 짧은 이야기는 단편 애니메이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산림조합.환경운동연합 등에서 의뢰를 받았어요. 환경을 생각하는 교육연극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죠. 이 간단한 이야기를 어떻게 1시간 넘는 연극으로 만들 수 있을지 처음에는 자신 없었어요. 그래서 착안해 낸 것이 '이미지 뮤지컬'입니다."

그가 말하는 '이미지 뮤지컬'은 언어 대신 시각적인 이미지와 노래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가령 숲을 찾아온 여자 국회의원의 하이힐을 지나칠 정도로 크게 부각해 도통 숲에는 무관심하다는 걸 표현하는 식이다. 노래도 20곡으로 전작보다 많다.

"어렸을 때 천안의 한 산골자락에서 자랐어요. 혼자 노는 데 익숙한 소년, 상상이 가시죠? 그때 책 읽고 산 타고 별의별 공상을 했던 것이 지금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때문일까. '연극=놀이'라는 그의 평소 지론대로 연습실은 마치 놀이터를 연상케 한다. 본격적인 극 연습에 앞선 트레이닝을 할 때 주요 레퍼토리는 '얼음땡' 아니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다. 모두 움직이다 갑자기 멈추는 방식으로, "호흡을 가다듬는데 이 방법이 최고"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중앙대 연극과 91학번인 그는 유시어터(대표 유인촌)에서 연출을 배웠다. 신인 시절 생각지 못한 작품의 대성공이 앞으로의 활동에 부담스럽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답했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저서에 '배우는 돈 없이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고등학교 때 그 글을 읽고 겉멋에 이끌려 연극을 하자고 결심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연극을 만드는 그 자체가 저에겐 꿈이고 놀이고 행복입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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