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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아름다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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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호 29면

늦가을의 산은 소멸의 빛으로 가득하다. 그 소멸의 빛을 보러 주말이면 산에는 등산객들로 인산인해다. 며칠 전 나도 붐비는 사람들 틈에 끼어 산에 올랐다. 산을 오르던 이들은 숨이 가빠 헐떡거리면서도 발걸음을 멈출 때면 저마다 탄성을 내지른다. 불이 붙은 듯 타오르는 산색의 아름다움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그날 나도 산자락마다 노랗게 피어 흔들리는 들국화 향에 반해버렸다. 절정의 빛을 보여주는 들국화도 찬 서리를 맞으면 곧 스러질 것이다. 그날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며 내 가슴 언저리엔 이런 물음이 맴돌았다. 왜 소멸의 빛깔은 저토록 아름다울까.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 나도 소멸의 순간이 가까워지면 저런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을까.


이런 절박한 물음을 품고 마을 어귀 논길로 들어서는데, 벼를 다 베고 난 텅 빈 논배미엔 우렁이 껍질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우리 마을은 우렁이 농법으로 유기농을 한다. 그러니까 논배미에 보이는 우렁이 껍질들은 성스러운 임무를 다 마치고 난 뒤의 잔해인 것. 엄지 손톱만한 우렁이 껍질 하나를 주워 들여다보는데, 문득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그 갑각의 무기물은 겨우내 삭고 부스러져 흙으로 화할 것이다. 나는 무슨 보물을 품듯이 우렁이 껍질 하나를 주워 와 내가 자주 보는 책들이 있는 서가에 올려놓았다.


소멸의 찬란한 빛을 보여주는 늦가을 산의 단풍. 들국화, 텅 빈 논배미, 우렁이 껍질들은 모두 나의 근친이다. 스스로 돌아갈 곳을 알아 고요히 스러지는 것들. 내가 저들을 근친이라 하는 것은 나도 저들과 다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도의 지능을 가진 존재는 저들의 고요한 스러짐을 ‘죽음’이라 명명하며 두려워하지만, 생성과 소멸이 우주 생명의 이치임을 깨달으면 죽음은 없는 것이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께서는 나에게 손수 묵화 한 점을 쳐주신 적이 있는데, 화제가 “천지여아동근, 만물여아일체”(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였다. 그렇다. ‘하늘과 땅이 나와 한 뿌리요, 만물과 내가 한 몸’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쌀값 좀 제대로 받겠다고 시위하다 목숨을 잃은 농부의 억울함에 동조하는 이들이 ‘백남기는 우리다’라고 항변하는 팻말을 보았다. 아, 그래 백남기 농부는 죽은 것이 아니구나. 저렇듯 살아 있구나. 평생 땅에 두더지처럼 엎드려 나를 위해 땀 흘리셨던 농부인 내 어머니는 곧 나이며, 유기농을 위해 논배미에서 살다 껍질만 남은 우렁이 또한 나이고, 잡초 요리를 즐겨 먹는 나에겐 잡초들이 곧 나이고,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 조차 하느님처럼 공경하며 살았던 장일순 또한 내가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늦가을 산의 소멸의 빛이 아름다운 것은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욕망의 자의식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과 들에서 마음의 안식을 누리는 것은 그런 자의식이 없는 존재들의 아름다움이 우리 눈을 황홀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저 아름다움의 황홀에 눈멀지 않고 겨울이 지나 봄이 도래하면 새롭게 움틀 파릇파릇한 생성의 빛, 창조의 빛을 볼 줄 아는 보배로운 눈을 가져야 하리라.


고진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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