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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국내각으로 위기 헤쳐 나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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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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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1979년 10월 26일, 나는 노량진 대성학원의 재수생이었다. 이튿날 흑백 TV에선 ‘박정희 대통령 유고’라는 정부 발표가 흘러나왔다. 대통령 유고는 온 나라 모든 기관의 정상적 흐름을 중단시켰다. 대성학원 동료들은 코앞에 다가온 대학입시가 취소될지 모른다는 혼란에 휩싸였다. 두터운 먹구름이 잔뜩 낀 불확실한 미래가 이어졌다. 10개월 만에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더니 국군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 젊은 기억 속의 대통령 유고는 일상을 바꾸고 역사를 뒤틀었다. 나는 지금 그때와 비슷한 심리적 충격에 시달리고 있다. 어른이 되고 기자 생활을 30년 했다 한들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일을 겪으리라 누군들 상상했겠는가. 하기야 내가 지적으로 게으른 탓이다. 볼셰비키 혁명을 불러들인 러시아 제정 말기의 라스푸틴이란 인물을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그 괴승이 국정을 흔들어 나라를 말아먹은 역사를 남의 나라의 만화 같은 얘기로만 치부했으니까.

지금 우리는 전대미문의 대통령 문제에 직면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살아 있는 유고’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대통령이 내리는 여러 정치적·정책적 결정들이 과연 그의 인격이 실린 선택인지 의심하고 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현재 이 시간에도 진행되고 있다. 최순실이 없어도 최순실의 영혼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어떻게 그렇게 어정쩡한 사과, 그렇게 미적미적한 조치가 나오겠는가. 분열적 성격, 정신적 불구라는 의심을 사면 리더십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상처 많은 박 대통령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청와대 통치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국정운영 체제를 망가뜨린 행위는 용납하기 어렵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비위를 파헤치고 국정조사를 결의하고 특검을 합의하는 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는 새 대통령이 뽑힐 때까지 14개월의 미래다. 14개월은 긴 시간이다.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안보·경제 비상사태에 정치적 적대와 무능, 사회적 분열과 분노, 정글 같은 이기심이 판치고 있다. 애국심이나 공동체를 경멸하는 냉소주의가 휘발유처럼 깔렸다. 불씨 하나가 회오리처럼 나라 전체를 태워버릴 기세다. 시중에 퍼져가는 탄핵·하야론은 삐끗 한 뼘만 어긋나도 큰불을 낼 수 있다. 가장 위험한 선택이다.

살얼음판 같은 14개월의 미래는 우리 국민에겐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세월이 될 것이다. 죽음의 계곡을 건널 땐 소리는 죽이고 의견은 모으고 싸움은 멈춰야 한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유일한 대안처럼 보이는 건 거국중립내각이다. ‘거국’으로 나라 전체가 참여하고 ‘중립’은 정파적 색채를 띠지 않으며 ‘내각’은 최종 의사결정 기구다. 박 대통령의 청와대가 국정의 중심에서 후퇴하라는 의미다. 박 대통령은 국내 정치에서 손을 떼고 헌법상 국가원수, 군 통수권, 외교안보적 결정권만 행사한다. 그의 사전에 거국중립내각이란 용어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스스로 판단을 내려 진짜 애국심을 발휘해 주기 바란다. 먼저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구체적인 정치일정을 제시하시라. 3당 대표와 3당 원내대표에게 부탁해 그들이 모두 동의하는 총리 후보를 추천받으시라. 그런 뒤 새 총리에게 안보·외치를 제외한 내각의 인사 전권을 부여하고 본인은 국정 무대의 전면에서 빠지시라. 박 대통령이 이런 선택을 할 경우 국회는 ‘거국중립내각 지원특별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새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면 된다. 박 대통령이 이를 거절하면 더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대통령의 판단을 돕기 위해 국회가 3당 주도로 ‘거국중립내각 구성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것도 좋겠다. 박 대통령이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일과 앞으로 나라의 안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더이상 국회 결의안을 무시하지는 못하리라 믿고 싶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