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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바람결에 흩날리고 강을 따라 떠도는 #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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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식 때 엘야르히무를 뵙고 깜짝 놀랐지. 그 무섭던 양반이 딴판이 되었더군.”

“내가 초짜 여행가일 때 한 번 길에서 마주쳤지. 실수로 후원가가 준 여행 자금을 집으로 보낸 이야기를 했다가 눈물이 쏙 나오게 혼났지 뭔가.”

“여행가가 지켜야 할 법도에 대해 아주 꼬장꼬장한 양반이었지.”

“머무르지 않을 사람은 머무는 자에게 정을 주지도 받지도 말라, 그게 그 양반 철칙이었잖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는 후원가가 준 돈을 탈탈 털어 누나와 부모에게 썼는데……. 하지만 야힘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재밌어했다.

“아무튼, 언제부턴가 온화해지긴 했어도 그렇게 허물없이 막 대할 사람이 아니야!”

“나도 검은 사막에 가보려 했는데……, 어이쿠, 목숨이 열 개라도 힘들겠더군.”

“끝나지 않는 강은 어떤가? 거길 그만큼 걸은 이도 엘야르히무뿐이야.”

“나도 용기를 내어 가 봤어. 달포 정도 강을 따라 걷다 포기하고 돌아왔지. 나중에 그 지역 사람들이 말하길 내가 걸은 길이는 수박 겉핥기도 안 된다더군. 밤마다 듣도 보도 못한 짐승들이 울어대는데……, 그 지역 사람들도 거길 뭣 하러 들어가느냐고…….”

“참으로 대단한 여행가야. 이제껏 없었고 앞으로도 100년은 그만한 여행가는 나오지 않을 걸세.”

“100년? 1,000년이 지나도 안 나올 걸? 영주가 직접 대면하는 여행가가 아닌가? 오란다고 막 가도 되면 나도 가지.”

“그러게 말일세.”

다들 맞장구치며 나한테 갈 생각도 하지 말라 했다.

“야힘이 야힘이라 부르라고 했어요! 야힘이 찾아오라 했고요! 그래서 야힘이라 부르고, 그래서 가겠다는데 왜들 그래요?”

나는 억울한 마음에 따졌다.

“오란다고 막 가도 되면 나도 간다? 엘야르히무가 자네한테도 오라 청했나?”

하르윈이 말했다. 자기도 간다 운운한 여행가가 “아니,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말끝을 흐리며 뒷머리를 긁었다.

“엘야르히무가 배운 서가에서 나온 여행가라고, 그가 다 야힘이라 부르라 하고, 형제라 칭하진 않는다네. 그를 야힘이라 부르는 이는……, 이제 자네뿐이군.”

누군가 잔을 들었다. 모두 카누인을 위해 건배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도 카누인 어르신이 자란 서가에 들어가 카누인 어르신에게 배웠어요, 야힘이 같은 서가 출신은 형제라고, 의형제 삼자고…….”
“그래, 좋겠군, 부러워.”

하르윈이 부드럽게 말했다.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다들 부러워서 그래.”

맥주를 산 이가 말하자 다들 머쓱하니 눈을 돌렸다.

“카누인은 너무 일찍 서가에 들어갔어. 대단한 여행가였는데…….”

“카누인의 여행기를 읽어보았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보고 싶은데…….”

“그의 여행기는 영주들이 서가로 내놓질 않아! 필사도 못하게 하고!”

“카누인을 후원했던 영주가 집안이 어려워지자 카누인의 여행기를 내놨는데, 얼마에 팔렸는지 아나?”

값을 말하자 다들 입을 쩍 벌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그게 얼마인지 감도 오질 않았다.

“그이는 군주들이 다스리는 지역에도 다녀왔지.”

“마지막 여행이었어.”

“거기서 전쟁을 봤다지…….”

“전쟁이요?”

내가 물었다. 이 땅은 지난 수백 년간 작은 싸움은 있었을지 몰라도 전쟁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그 여행기를 쓰고 나서 은퇴해 서가로 들어갔어. 도대체 뭘 보고 온 걸까? 카누인 정도의 여행가가 더 이상 떠돌지 않기로 결심하게 만든 건 대관절 뭐냔 말일세.”

“군주들이 지배하는 땅 너머 어딘가에 황금이 가득 찬 섬이 있다지…….”

“야힘이라 부르고 의형제를 삼을 정도라면, 혹시 엘야르히무에게 황금 섬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었는가?”
누군가 물었다. 다들 나를 보며 귀를 곤두세웠다.

“황금 섬이라면…….”

나는 황금 섬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가로막은 산맥을 지나 어떤 배도 상륙한 적 없는 섬에 가면, 금이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고, 강을 따라 흘러 손만 뻗어 건지면 된다더군.”

“섬 중앙에는 순금으로 된 탑 아홉 개가 높이 솟은 거대한 성이 있고…….”

“성으로 가는 길도 금으로 칠했고…….”

“술잔도, 그릇도, 접시도, 요강까지 금으로 만들 만큼 금이 넘친다지.”

모두 꿈꾸는 듯 한 마디씩 말을 이었다.

“정말 그런 곳이 있나요?”

내가 물었다.

“누가 알겠나! 아무도 가지 못했는데! 카누인도 떠날 때 목적지는 황금 섬이었지만, 군주들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을 보고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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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를 산 여행가가 말했다.

“엘야르히무가 오래 전 장장 15년에 걸쳐 다녀왔어. 영주가 엄청난 돈을 냈지. 길목에 있는 영주들에게 서한과 선물까지 보내 가는 길도 편하게 했단 말이야. 그런데 돌아와 영주에게 그런 곳이 없더라 말했단 말이지.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여긴 영주가 태형을 가했어.”

“태형을요?”

화들짝 놀라 물었다. 태형은 몸에 물을 뿌려 몽둥이로 내려치는 형벌로,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10대가 넘어가니 영주 부인이 나와 말렸지. 딸까지 합세해 만류하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은 부지한 걸세. 그때 다친 다리 때문에 여직 지팡이를 짚지 않나.”

“그래도 영주 딸과 부인이 나섰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내가 말했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왜 여행가 하나를 위해 영주 딸과 부인이 나서나?”

“게다가 돌아올 때마다 직접 만나곤 하지.”

“태형을 가했다면서요?”

“아, 그건 그 전 영주고……, 지금은 그때 말렸던 영주 딸이 영주가 되었지. 그분은 매번 엘야르히무를 직접 만나.”

“은퇴할 뜻을 밝혔을 땐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라고 엘야르히무 고향 마을을 사서 통째로 내줬지.”

“정말 엘야르히무가 황금 섬에 대해 말한 바 없나?”
하르윈이 재차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야힘이 여기로 절 데리고 올 때까지 엘야르히무인 줄도 몰랐어요.”

“과연, 엘야르히무답군…….”

맥주를 산 여행가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레 정적이 흐르고 간간이 모닥불이 타 들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나도 상인을 모신다네.”

침묵을 깨고 한 여행가가 말했다. 그는 불콰한 얼굴로 말했다.

“영주들은 내 여행기를 좋아하지 않았어. 날 가르친 이가 말하길 내 문장은 고상함이 부족하다더군. 나도 고상하게 써 보려 했지.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가? 그래도 상인은 좋아했어.
그치도 자네가 섬긴 상인과 비슷한 경우인데, 몰락해가는 영주 가문 아들을 남편으로 맞이해 돈으로 명예를 산 게지. 근데 그놈의 남편이 매 끼니마다 온갖 복잡다단한 순서로 식사를 하고, 옷 입는 법부터 말투까지 하나하나 격식을 차리는 거야. 거기 맞추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던 게지. 자수성가한 여잔데, 돈이 쌓였어도 싸구려 맥주를 잊지 못했어.
남편은 내가 와서 여행기를 읊으면 질색을 했어. 어떻게 여행가를 직접 만나느냐고……. 상인이 그것만은 양보하지 않아서 남편이 나만 오면 자리를 피했지.
갈 때마다 맥주 통을 사들고 갔고, 상인은 늘 영주보다 두 배씩 돈을 줬어. 그리고 다른 여행가들은 왜 그렇게 어렵게 쓰느냐고 푸념을 했지. 내 여행기는 쉬워서 좋다고. 상인 남편은 다른 여행가를 후원하는데, 남편한테 무식하다는 소리 안 들으려 울며 겨자 먹기로 읽는다더군.”

“저도 어르신이 생전에 걱정 많이 하셨어요. 영주들이 받기엔 너무 천박하다고……. 그래서 상인에게 간 거예요.”
내가 말했다.

“여행기가 너무 영주들의 입맛에 길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상인은 내게 늘 어디는 좋았고, 어디는 지루했다고 말해 주지. 그래서 난 그가 어떤 곳을 좋아하는지 잘 안다네. 후원가가 바라는 곳에 가는 게 좋지 않나? 그런데 영주들은? 어느 날 벼락처럼 더 이상 여행기를 받지 않는다고 통보할 뿐이야. 뭐가 싫고, 뭐가 좋은지 우리로서는 알 방법이 없어.”

“저도 제 후원가가 뭘 바라는지 잘 알았어요.”
나도 동의했다.

“자네들 여행기를 폄하하려는 건 아닐세.”

맥주를 산 여행가가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가 아니다.’라는 말로 말을 시작하는 사람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긴장되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여행기의 진가를 몰라. 쉽고, 자극적인 이야기에만 열을 올려. 우리가 여행기 한 편을 위해 얼마나 많은 지역을, 얼마나 오래 떠돌아다니나. 간 곳을 다 적는가? 아니지, 아닐세. 정말 담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곳만 담아. 왜? 종이가 썩어나질 않으니까. 설사 종이가 차고 넘친다 해도 진정 기록할 만한 곳을 적고, 훗날 서가에서 내 여행기를 읽을 어린 여행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여행기를 남겨야지 않는가?”

“그것도…… 사실이에요. 영주마다 절 거절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에 상인에게 제 여행기를 보내며, 어른신이 손수 필사해 주셨는데, 상인은 제 글씨나 어르신 글씨나 같이 취급했어요.”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노인이 직접 필사한 여행기를 대충 훑더니 읽는 게 귀찮다며 말로 해 보라던 상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이 저려왔다. 그렇게 취급할 여행기가 아니었다. 어르신이 옮겨준 여행기를 보며 정갈한 글씨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여행기에 얼마나 울었던가…….
난 잘 울지 않았다. 사내가 날 때리고, 범하고, 버린 날도, 상인이 새 여행가를 맞이한 날에도 울지 않았다. 내가 길에서 운 건, 어느 날 누나를 닮은 여인을 봤을 때뿐이었다. 그 후 서가에서 지내며 엘야르히무의 여행기를 읽으며 울었고, 그만한 여행기는 쓸 수 없어 울었고, 노인이 내 초라한 여행기를 필사해준 걸 보며 울었고, 상인이 그 여행기를 한쪽으로 민 날, 방에 돌아와 울었다.

“카누인이 네 여행기를 필사했다고?”

맥주를 산 여행가가 양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나도 모르게 맞나 싶어 몸을 움츠렸다.

“맙소사, 카누인이? 그 카누인이? 엘야르히무와 어깨를 겨누는 양대 여행가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그 카누인이? 자네 도대체 뭔가? 왜 그분이 직접 여행기를 필사하고, 엘야르히무는 자넬 의형제로 맞이했나? 자네, 설마…….”

그가 갑작스레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다른 여행가도 마찬가지였다.

“야힘과 어르신이요? 저를요? 아이구…….”

나는 어처구니없어 웃었다. 누가 맥주를 산 여행가 뒤통수를 쳤다.

“무슨 생각인 게야?”

“미안허이,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가서……. 혹시 여행기 있나?”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열었다. 상인은 재밌게 읽은 여행기는 남기고, 나머지는 가져가 후원가를 쓸 때 찾아도 좋다고 했다. 그가 건넨 여행기 중 노인이 손수 필사한 여행기도 있었다. 그걸 제일 먼저 꺼내며 마침 잘 되었다 여겼다.

“혹시 서가가 있는 도시에 들를 분 있나요? 이걸…… 맡겨 주세요.”

맥주를 산 이가 손을 바지춤에 문질러 닦더니 두 손으로 여행기를 받았다. 그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여행기를 넘겼다. 다들 그의 어깨너머로 숨소리조차 아끼며 여행기를, 카누인의 글씨를 음미했다.

“내가 맡겠네.”

하르윈이 말했다. 짐을 덜은 기분이었다. 이제 이 여행기는 가치를 아는 곳에 머물 것이다.

“그런데…… 정말…….”

맥주를 산 이가 머뭇머뭇 말했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죠.”

“그게……!”

그는 내가 태연스레 뱉은 말에 자기가 말문이 막혔다. 나는 내가 쓴 여행기를 돌렸다. 여행가들은 놀라고, 당황하며 읽었다. 외설스러운 이야기가 가득한 탓이었다.

 “이게…… 도대체 뭔가?”

맥주를 산 여행가가 물었다.

“이건 왜 뚝 끊어졌어? 뒷장은 어디 있나?”

상인에게 후원받는 여행가가 물었다.

“상인이 재밌어서 그 부분은 가지고 있겠다고 했어요.”

“여행기를 잘라 갔다고?”

다들 입을 떡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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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장편 [지우전 : 모두 나를 칼이라 했다], [부엉이 소녀 욜란드],
작품집 [원초적 본능 feat. 미소년], [각인]을 출간하고 다수의 공동 작품집에 단편을 수록한 이 인간의 작업 책상에는 컴퓨터, 프린터/스캐너 복합기, 지난 밤 마신 맥주 캔, 고양이가 있다. 네 발 달린 아해가 책상을 오르내리며 키보드를 밟아도 오타는 모두 작가의 책임이라는 게 냉엄한 현실.

오늘도 글을 쓰며 고양이와 키배, 아니 키보드 쟁탈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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