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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인 소멸…「숫자」맞추기-내년 나라 살림 어떻게 짜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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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새해 예산안이 행정부 측에서 마련한대로 형식적 삭감만 하고 국회에서 거의 무수정 통과되었다. 국회의 예산심의 태도는 옳았는지, 또 원안에서 무엇이 바뀌고 내년도 예산의 특징이 무엇인지 4회에 걸쳐 시리즈로 엮는다. <편집자주>
새해 예산이 확정되기까지의 과정과 내용을 들여다보면 「확정」이란 말을 쓰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어설프기 짝이 없다.
국민의 세 부담과 한해의 나라 살림을 결정짓는 국회를 열어 놓고서도 정부와 여당의 필요에 따른 부분적인 「숫자 맞추기」는 있었지만 사업의 우선 순위나 국민의 세 부담 등을 고려한 진지한 「심의」는 한 대목도 끼어 들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 총 규모 15조5천8백억원에 이르렀던 예산안이 어디서 얼마나 깎이고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뜯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쉽게 알 수 있다.
첫째, 예산안의 기본 골격과 전제는 전혀 손을 대보지도 못했다.
적어도 내년 예산안을 한번이라도 진지하게「심의」하려 했다면 복지와 농어촌 대책에 대한 재정수요를 크게 늘린다는 기본 골격과 87년의 경제성장·경상수지·환율 등에 대한 기본전제를 우선 따져보아야만 했다.
복지·농어촌 대책 등에 대한 재정수요는 백 번 양보해 「정치의 영역」이라 치더라도 내년 예산안이 불변 성장률을7·5%,경상수지 흑자를 23억 달러, 연평균 환율을 달러 당 8백65원으로 잡고 짜여진 것이었다는 사실은 벌써 「산수」적으로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전혀 예측도 못했던 3저의 효과 등으로 인해 최근에 나온 가장 보수적인 전망치 만으로도 내년 성장은 8∼9%, 경상수지 흑자는 50억 달러 이상으로 예상되고있고 환율 또한 불안하기 그지없다.
둘째, 그같은 기본 골격과 전제에 대한 검토조차 없었기에 순 규모 2백18억원에 불과한 삭감·증액은 우선 그 규모로도 「인색」하기 짝이 없고, 그 내용으로도 「원안」통과와 다를바 없다.
순 삭감 규모 2백18억원 중 절반 이상인 1백11억원이 내년에 25%까지 올리기로 한 원유관세를 「0· 5%」깎음으로써 얻어진 것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깎았다는 「시늉」을 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삭감과 증액의 내용을 대조해 보면 또 다른 석연치 않은 점들이 보인다.
총 7백87억원의 삭감액 중 눈에 띄는 것은 ▲방위비 1백30억원 ▲외국환 형평기금 1백억원 ▲양곡관리 기금이자 1백억원 ▲산은·도로공사 출자 1백50억원 ▲의료보험 30억원 등이다.
이중 방위비의 삭감은 가장 「경직성」이 강한 비목에서 다소라도 융통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나 나머지 삭감 분은 내년도의 주요한 행정목표 사업에서 삭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외국환 형평기금은 해외부문의 통화증발로 인한 통화 관리상 책정된 것이고 양곡관리기금이자는 늘어나는 한은의 적자를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대신 증액된 비목은 ▲금강산 대응 댐 3백억원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전한밭 도서관 12억원 ▲목포대학 시설 2억원 ▲전주 박물관 5억원 ▲자운서원 정화 5억원 등 「지역구」 냄새가 짙은 것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고양향교보수 2억원 등의 증액내용도 보인다.
또 「안보수요」랄지, 「치안수요」랄지「검사증원 2억원」등의 항목도 눈에 띈다.
더구나 이같은 총26개 항목의 자질구레한 증액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여당 「예정된 합의」에 의한 것이었지 밀고 밀치는 가운데 「심의·조정」된 내용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물론 처음부터 예산당국이 어련히 알아서 갈 짜 놓았겠느냐하면 할말이 없으나 무엇하러 예산·결산에 대한 심의. 의결권이 국회에 있느냐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게 하는 「예산심의」가 아닐 수 없다. <김수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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