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문화예술공간의 특성화 아쉽다|특집좌담 한국의 공연·전시장…그 현실과 과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8·15해방을 기점으로 잡는다해도 우리 나라의 문화예술은 이제 40년을 넘기는 장년기에 접어들었다. 해방 후의 혼란기였던 40년대 중·후반, 6·25 전쟁의 부상을 채 씻어버리지 못했던 50년대를 넘긴 우리 문화예술은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착의 토양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괄목할 만한 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공연예술분야·전시예술분야는 그 공연·전시공간이 다양화하고 확대됨에 따라 그 발전의 폭도 훨씬 넓어질 수 있었고, 그 템포도 빨라질 수 있었다.
중앙일보 새 사옥 건립과 함께 개관한 호암갤러리·호암아트홀도 그 발전을 더욱 촉진시키는데 이바지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음악·무용평론가인 이일씨(홍익대교수), 연출가 허규씨(국립극장 장)의 좌담으로 우리 나라 공연예술·전시예술의 발전과정, 그리고 그 현실과 과제를 들어본다. 【편집자주】

<모방 아닌 나의 것>
-일제치하에서도 우리 문화예술은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왔습니다만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때문에 「순수한 우리 것」으로 키우고 살찌게 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해방이후의 우리 문화예술, 특히 공연예술과 전시예술은 경제발전, 혹은 사회발전과 보조를 맞추면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해 왔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10년을 단위로 쪼개서 볼 때 그 발전은 가속화하는 현상을 보여서 80년대에 들어선 이후에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갖게 됩니다. 우선 해방이후 우리 공연예술·전시예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80년대의 특징적 흐름은 무엇인가부터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박용구=해방직후에는 순수예술은 없이 이데올로기만 난무하는 혼란 속에 우리 예술계가 놓여있었습니다. 50, 60년대는 조금씩 예술에 대한 안목이 생겨 하나의 기틀을 이루려는 시행착오적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다고 봐요. 70년대 후반부터는 우리 것을 찾자는 뿌리의식이 음악·무용·공연전반에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회귀현상이랄 까요? 외국서 서양예술을 배우고 추구했던 많은 예술가들이 테크닉은 그곳서 습득하되 예술의 기조는 한국적인데 근원을 두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곧 세계적일 수 있는 것은 결국 타의 모방이 아닌 자기의 것이어야만 한다는 자각을 가진 거죠.
▲허규=연극계는 70년대부터 본격적인 공연장이 생겨났고 80년대 들어선 공연법 개정 후 많은 소극장이 생겨나 부수적으로 다양한 공연물이 무대에 오르게 됐습니다. 80년대에 이러한 소극장무대를 통해 「우리연극」을 만들자는 시도와 운동이 역시 활발해졌습니다. 그 동안 대한민국연극제라는 제도를 통해 실험적인 80∼90편의 창작물이 발굴됐으며 마당놀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대중에게 친숙해지고 본격화됐습니다.

<공간활용이 숙제>
-미술의 경우 특히 괄목할 만큼 전시공간이 다양해지고 확대되지 않았습니까? 그에 따라 80년대의 미술계에도 특징적인 동향이 생겨났을텐데요?
▲이일=10여년 전만 해도 마땅한 전시장이 없어 초대전·그룹전 위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미술인들에게 80년대는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전시공간이 풍요로워졌지요. 60년대는 전시공간이 없어 작가들의 창작의욕이 위축되는 양상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공간이 제대로 활용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거리가 너무 멀어 이용도가 아주 낮은 형편이니 활용책이 강구돼야한다고 봅니다.
88년에는 예술의 전당 내 전시장(2천 평)이 완공될 예정이고 현재 서울 종로구 관훈동 일대에만 70여 개의 화랑이 몰려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연장 및 전시공간과 공연예술발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예술공간들은 어떻게 운영되고 쓰여져야 우리예술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겠습니까?
▲허=앞으로도 예술의 전당 등 대형공연장이 많이 생겨날 것이고 주요 지방도시에도 실내공연장과 놀이마당이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공간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용할 것인가를 계획하고 결정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공연장만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날 뿐 공연장의 특성화와 전문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공연장을 짓되 어느 지역의 특장예술을 수용할 수 있는 쪽으로 공간이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도 한 방안이지요. 또한 공연장의 성격에 따라 그에 적절한 작품도 개발될 수 있으니 제대로의 기능과 특성을 가진 공연장을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박=요즘의 공연장은 무엇이든 공연할 수 있는 다목적인데 이는 결국 어느 것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공연장은 오페라나 성악·연극 등 각 예술장르에 맞는 단일목적의 공연장으로 세분화돼야 합니다. 어디에 가면 늘 어떤 종류의 공연을 접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끔 말입니다.

<범국민적 후원을>
▲허=우리 나라의 경우 여러 장르의 공연이 한 공연장을 나눠 쓰므로 한 작품의 공연일수가 1주일을 못 넘습니다. 단일 목적의 극장에서 보다 프러패셔널한 감각의 직업공연단체 작품이 계속 공연될 수 있어야 공연인구도 확대되고 해당분야예술에도 집중적인 발전이 있습니다.
-전시공간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이=특성·전문화된 공간을 제대로 이끌어 가는데 우선 필요한 것은 그를 알고 지휘할 전문인력입니다. 2년 반 걸려 현대미술관을 짓고 나서 이제 사람이 없으니 단기 해외연수를 시킨다는 것은 우선 짓고 내용은 나중에 채운다는 무계획성을 드러내는 것 아닙니까?
▲박=지난 40년 동안 우리 문화계가 가장 소홀했던 게 인재양성입니다. 국내에서만 교육받아 지금 크게 활동하는 연주가는 찾아보기 힘든 상태 아닙니까?
문화예술을 만드는 주체는 사람이고 어떤 정책과 시설, 투자도 사람을 키우지 않고는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예술가를 양성하는 일관된 교육시스팀이 필요합니다.
-요즘 기업에서 예술에 투자하는 현상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대우합창단·럭키무용단의 활동이 그것이지요.
허 선생은 국립극장 장으로서 기업의 예술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투자방법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요.
▲허=공연단체의 예술성과 자율성의 관점에서 볼 때 기업이 예술단체를 직접 갖고 운영한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새로 창단해 활동하기보다는 기존단체의 후원자가 되어 그를 육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그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2년째 롱런하고 있는 뮤지컬 「캣츠」는 일본의 아지노모토회사가 전국 순회공연을 위한 가설 천막극장을 만드는데 2억 엔을 보조했으며 기타 기업체들도 티켓을 팔아주는데 큰 몫을 했습니다. 가령 「캣츠」의 티켓을 산 사람에게 호텔료를 디스카운트해주거나 자사직원 가족에게 티켓을 서비스하는 방법들을 동원했습니다.
문화사업적 차원에서 적자를 감수해야하는 공연예술은 이제 기업이 관심을 쏟지 않으면 헤쳐나갈 방법이 막연합니다.
▲이=문화예술의 진흥은 군 주도에서 벗어나 민간레벨에서 추진돼야 예술의 자율성이 꽃피고 문화인의 자생력도 강해집니다.
미술의 경우 컬렉터의 층을 두껍게 하고 저변 확대하는 것이 화가들이 활로를 찾게 하는 방안인데 우리 나라는 컬렉터의 층도 약하고 수도 적을 뿐 아니라 고객이 되는 미술관이나 화랑자체가 가난합니다.
또 작품수집도 몇몇 작가에 몰려있고 경매시장도 없어 작품의 시장 가격도 제대로 형성되어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외국의 경우 일정한 예술적 흐름을 담은 작품들의 컬렉션이 끝나면 새롭게 컬렉션의 대상이 될 새로운 경향의 작품바람을 일으킵니다.
여유 있는 기업 쪽이 컬렉터의 저변확대에 크게 기여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화가들이 수준 높은 예술작업에 전념할 수 있을 겁니다.

<품위도 다듬을 때>
-세분 모두 기업의 예술지원 및 육성사업에 큰 기대와 관심을 보이셨는데 그런 맥락에서 호암아트홀과 갤러리의 운영에 도움이 될 좋은 말씀을 해주시지요.
▲박=호암아트홀은 수준 높은 안목으로 격조 있는 공연을 유치하거나 그러한 공연에 대관을 해왔습니다만 아직 전문 공연장으로서의 성격형성은 이루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 예술계를 리드할 방향을 잡아 전문공연장으로서 자리를 굳혀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령 음악발전의 근간이 되는 실내악의 전용 연주장으로서의 모습을 갖는 것도 한 방법이지요.
▲허=호암아트홀 하면 우선 무척 고급스러운 예술공간이란 생각이 듭니다.
1천 석의 규모로 보아 연극공연장으로 최 적격인데 자체기획의 연극이나 뮤지컬 등을 10여 편 마련해 1년 동안 선보이는 것도 이 공연장의 성격과 품위를 다듬어 가는 방법입니다.
요즘 국악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는데 국악정립을 위한 국악상연장으로서도 생각해 봄직 합니다.
▲이=오픈 된 지 오래지않아 아직 개성이나 성격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미술계의 흐름을 선도한다는 사명감아래 국내 및 국외 우수작가들의 기획전을 선별적으로 유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문화예술발전을 뒷받침하겠다는 목적으로 문을 연 문화공간입니다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의 공연예술과 호암아트홀 및 갤러리의 발전을 위해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석자>▲박용구<음악·무용평론가> ▲이일 <미술평론가·홍익대교수> ▲허규 <연출가·국립극장 장> 진행=정규웅 문화부장 기록=고혜련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