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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일과 쉼을 나눈 출퇴근, AI가 없앨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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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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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의 역사
이언 게이틀리 지음
박중서 옮김, 책세상
442쪽, 1만9800원

사냥터와 아궁이 분리된 산업시대
교통의 발달 맞물려 통근문화 탄생
유연·재택근무 새 실험 시도돼도
습관이 된 ‘이동의 자유’ 계속될 것

‘아침에 일어나 정기적으로 어딘가 출근할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새로운 복음이 한국 사회에 울려 퍼진 지 오래다. 집에서 직장에 근무하러 다니는 통근(通勤)이 부러운 일이 된 셈인데, 불과 200년 전만 해도 통근은 파격적인 행위였다. 일터와 쉼터가 동일했던 농경사회에서 사무실과 가정이 분리되는 산업사회로의 이행이 ‘통근 탄생’의 배경이다.

“아궁이와 사냥터를 분리하려는 열망, 즉 건강한 곳에서 살고 수익이 가장 많은 곳에서 일하려는 열망은 19세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강화되었다. 이런 분리는 증기력을 이용한 운송수단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기술 덕분에 가능해졌으며, 결국 통근의 꽃봉오리가 맺히고 (…) ‘철도문화’라고 일컬어진 더 커다란 발전의 일부였다.”(21쪽)

문명사 저술가이자 소설가인 이언 게이틀리(53)는 통근의 과거, 현재, 미래를 살펴 인류가 오늘에 이른 동력 중 하나인 ‘이동의 자유’를 찬미한다. 그가 2014년에 펴낸 『출퇴근의 역사』(원제 Rush Hour)는 습관처럼 오가던 통근 길을 문화사 측면에서 곱씹어보게 하는 일종의 인류 여행 안내서다. 오늘날 전 세계 5억 명이 넘는 직장인이 매일 일하러 오가며 겪는 이야기를 게이틀리는 석기시대로부터의 유전자 경향을 중심으로 풀어낸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무실 근무자가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은 사냥 및 채집을 하려는 유전적 경향을 만족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규칙적인 이 방랑벽 덕에 통근은 우리 곁에 항상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그는 예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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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 영국 런던에 이층 버스의 원조격인 승합 마차가 등장했다. 마차의 지붕 위에 좌석을 추가로 설치해 출퇴근 승객들이 앉았다. [사진 책세상]

‘통근하다’라는 영어 단어 ‘commute’는 1843년 한 미국 철도회사가 승객 가운데 일정 기간 승차 요금을 미리 ‘일괄 지불(commute)’하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철도에 이어 자전거(오토바이), 자동차가 주요 통근 수단으로 등장했다. 현대의 교외(郊外)는 자동차 열풍의 산물이었다. 이어 대중교통 수단인 전차와 버스가 직장인을 대량으로 실어 날랐고, 현대 도시의 상징이라 할 지하철이 ‘지옥철’이란 숙명을 안고 출현했다.

“우리가 과밀을 견디는 방법에 관해서는 생물학적 설명 말고 문화적 설명도 있다. (…) 누군가가 말을 걸기 전에는 말하지 않기, 여성에게 자리 양보하기, 이 악물고 견디기 등의 행동은 반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학습된 것이다.”(213쪽)

통근자들의 문화적 영향력 또한 인류 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휴대성, 소형화, 연결성이 좋은 신제품을 열망하는 이들의 소비 패턴이 여러 분야에서 혁신을 촉진했다. 상업용 휴대전화 서비스는 1969년 뉴욕과 워싱턴 DC를 오가는 고속철도 메트로라이너 열차에 처음 도입됐다. 정기적으로 문자 전송을 즐긴 최초의 사람들도 통근자들이었다.

4차 산업혁명시대로 접어든 21세기, 인공지능이 출몰하고 새 일자리가 튀어나오는 현실에서 통근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 원격 근로, 유연 근무제, 재택근무 등 다양한 형식이 실험되고 있지만 첨단 IT 업계를 비롯한 대다수 고용주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얼굴을 볼 수 있는’ 통근자를 원한다. “30세기의 인간은 통근의 기회조차 갖지 못할 것”이라며 러시아워의 죽음이나 통근의 종말을 가정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게이틀리는 여전히 통근의 승리를 점친다.

“통근은 도시의 형성과 성장을 촉진했다. 통근은 새로운 기술의 시험 무대인 동시에 판매 시장이기도 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봐도 통근의 영향력은 압도적으로 긍정적이었다.”(401쪽)

통근은 우리 삶의 긍정적인 부분인가. 답은 당신 마음에 달려있다.

[S BOX] 푸시맨 시작은 일본 지옥철

대중교통의 과밀 현상은 세계 주요 도시의 공통점이다. “돼지에게조차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공간 속에 잔뜩 쑤셔 박히는 상황”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인 ‘승객 욱여넣기(crush loading)’는 통근의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각국이 러시아워에 운영하는 푸시맨(push man, 혼잡한 출퇴근 시간에 승객을 지하철 객차 안으로 밀어 넣어주는 사람)의 전통이 체계적인 곳이 일본이다. 1960년대에 이미 ‘초절정 승객 욱여넣기(super crush loading)’에 직면한 일본 열차 운영업체는 ‘오시야(승객 정렬 담당원)’란 이름으로 푸시맨을 고용했다.

일본에서는 러시아워 여행자의 전형인 샐러리맨과 여학생이 과밀한 지하철의 압착 상황에서 벌이는 일을 소재로 한 ‘대중교통 포르노’까지 유행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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