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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일중 김충원> 제2부<8>|일 NHK방송 취재·작가 정상천 집필… 본사독점연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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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9월. 영하회족 자치구의 수도 은천에는 이미 가을이 깊어 있었다. 낮이 되어도 기온이 16도밖에 올라가지 않는다. 도착한 취재팀은 우선 스웨터를 사야 했다. 시내 집집마다 창에는 새빨간 고추다발이 매달려 회색이나 황갈색 벽 속에서 선연하게 비친다.
그리고 교외는 풍요한 결실의 계절을 맞고 있었다. 포플러 가로수로 양쪽에 펼쳐진 논에 벼이삭은 고개를 숙이고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은천시가지는 황하에서 약15km서쪽에 있다. 은천이라는 이름은 원래 황하와 황하에서 끌어온 용수로를 형용하는 말이었다.
1944년, 그때까지의 영하에서 은천으로 도시의 이름이 바뀌었다. 은천은 황하의 혜택을 받는 <새상강남>의 중심지로 어울린다.
은천은 예부터 풍요한 땅을 자랑한 황하문명 발상지의 하나였다. 시의 남쪽20km거리의 수동구지구에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있고, 이미 3만년 전에 이 곳에서 생활이 영위되었음을 보여준다.

<황하문명 꽃핀 은천>
1천4백년전인 수대에는 이미<새상강남>의 영예를 누렸다. 시가지 서쪽으로는 당대에 축조된 용수로에 지금도 물이 콸콸흐르고 있다. 그리고 서하왕국이 은천땅을 영하의 중심으로 요지부동의 자리가 되게 굳혔다.
시가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집들의 지붕 저쪽에 탑끝이 보인다. 이것은 서하시대에 세워진 불교사원 해보사탑으로 북탑이라 불린다.
승천사탑 주위는 부산스런 자유시장이다. 비를 가리는 덮개를 씌운 좌판이 2열로 늘어서 있었다. 감자·콩·마늘·토마토·동아등의 야채류와 산 닭과 온갖 식료품이 가게 바깥까지 늘어놓여있다. 게다가 회족을 위한 양육소맥관도 있다. 가까와진 중추절을 위해 리어카 좌판에서 월병을 팔고 있다. 시장판의 떠들썩한 한가운데에 있어도 이따금씩 댕그랑 댕그랑 맑은 소리가 들려온다. 승천사탑의 8각형 모서리에 매달린 풍경소리.
은천시 인구는 약70만명이며 그중에 회족은 13만명으로 약5명에 1명꼴이다. 회족자치구의 수도인 만큼 이슬람교도 (회교도) 특유의 차양 없는 백색이나 흑색 모자를 쓴 사람으로 꽉 찼으려니 했는데 예상외로 차양 없는 모자를 쓴 사람은 드물다.
영하전시대(TV방송국) 의 안내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최근에 모자를 안쓰는 젊은이들이 늘어나서 어떤 사람이 회족인지 겉으로 봐선 모릅니다』하는 설명. 모습이나 말이나 한족과 다름없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하회족자치구에는 중국전체 회족의 18%에 해당하는 1백32만명이 살고 있다 한다. 어떠한 역사를 거쳐 이 땀에 회족이 많이 살게 되었을까?
중국에 이슬람교도가 크게 늘어나도록 계기를 만든 것은 몽고족. 13세기에 몽고족이 동남아시아를 통일하게 되면서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공장·노예가 강제적으로 끌려왔다.또 관료나 군인으로서 원왕조의 한민족 통치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다.

<한때 회족분리정책>
거기에다 이슬람상인의 활약도 컸다. 그러나 명대에 이르면 양상은 일변한다. 국취주의적 경향이 강한 한족왕조 밑에서 이슬람교도는 고난의 시대를 맞는다. 원대에 그 부와 권력으로 한족사회로 하여금 외경심을 품게 했던 이슬람교도의 사회가 명대에는 거꾸로 열등시 되고 경멸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교도는 주위의 한족사회에서 쏠리는 냉엄한 시선을 피하기 위해 복장도 성명도 한족풍으로 바꾸었다. 한족여성과의 결혼으로 용모·골격도 한족과 구별하기 어렵게 되어갔다. 말도 한어를 공통어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회족과 한족의 감정적 대립은 시대를 거침에 따라 격화했다. 명대에 <회>자를 <회>자로 바꾸어 써서 명시의 뜻을 나타냈다. 이 대립감정이 표면화하여 폭발한 것이 청대였다. 청의 동치년간 (1861∼74년), 섬서(섬서) 에서 감숙에 걸쳐 많이 살고 있던 회족이 군사봉기하였다가 청군에 진압되었다. 이른바 동치년간의 맥감회란이다.
이 반란 뒤에 청조는 맥서와 감숙의 위수유역에 사는 회족을 강제적으로 지금의 영하회족자치구의 지역에 이주시키고 동시에전국적으로 한족과 회족과의 분리거주 정책을 썼다.령하에 회족이 많아진 것은 이때의 강제이주가 계기였다.
회족은 문화혁명때 고통을 당했다. 이 시대에는<단백(양)>이니<흥묵 (돈) 위백(양)>의 슬로건 밑에 양치기를 금지 당하고 강제적으로 양돈을 해야 했던 것이다.
돼지를 부정하게 여기며 사육을 금지하고 있는 이슬람교도는 말할 것도 없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문화혁명때는『돼지를 터부로 하는 것은 종교에서 나온 미신이다』고 그들을 윽박질렀던 것이다. 지금은 물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문혁때도 고통당해>
9월18일,오랜만에 날씨가 개어 가란산으로 향했다. 평원 끝에서 갑자기 표고가 솟아올라서 마치 거대한 병풍이 사막에 둘러쳐져 있는 느낌이었다. 울퉁불퉁한 검은바위로 덮인 예각적인 산이라서 녹색은 의외로 적다.
서하사람은 이 산을 성산으로 우러렀던 모양인데 실경을 보고 그럴만 했겠다고 느꼈다. 바위 봉우리가 날카로운 가란산은 서방에서의 침략자를 의연히 거부하는 자연의 성채로 되어 있는 것이다.
멀리 황토색 범종 같은 큰 무덤이 몇 기 아지랭이 속에 떠올랐다. 서하사람들의 성지에 축조된 서하왕의 능원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범종 모양의 흙무덤은 영대라 불린다.
거리가 가까와짐에 따라 그 크기에 압도 당해버렸다. 높이 20m, 주위를 큰 보폭으로 돌아보았더니 초보 이상이나 된다. 표면은 풍화하여 껄죽껄죽한 앙토에다 세로로 여러 줄기의 골이 팼고, 가로로도 계단 같은 팸이 여러단 있는데다가 구멍이 숱하게 뚫려 있다.
암대 둘레에는 무수한 기와와 벽돌 등의 파편이 널려 있다. 그 중에서도 광택이 있는 맑은 녹색의 유리기와가 눈에 띈다. 유리기와에 덮인 영대가 찬연히 빛나던 시대엔 장관이었을 것으로 상상 되였다.
서하의 건국 당시, 중국은 송왕조였고, 북으로는 글안(거란·결단)족의 요나라가 있었다. 3개국은 오르도스를 접점으로 서로 견제하면서 각각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뒤에 여진족인 금나라가 대두하게 되자 서하는 송과의 우호관계를 더욱 대단히 했다. 그 영향이 묘표의 형식에도 강하게 나타나 있다.
은천시내에 서하연구 학자가 하나 있다. 영하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 이범문씨. 중국의 저명한 서하학자의 하나로 연구경력이 30년 가까이 된다. 전문은 서하사지만 서하문자, 서하의사회제도, 서하유만등에도 조예가 깊다.
만난 곳은 이씨의 자택에서 였다. 취재팀의 숙사 근처에 있는 공무원 아파트 3층이었다.
『서하는 탕구트라 불리는 티베트계 민족이 세운 나라다. 처음엔 현재의 사천성 북서부의 산속에 살다가 당대초기에 토번 (같은 티베트계민족)의 압박을 받아 감숙성을 북상하여 합서성 북부의 황산이라는 곳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코 베어버려>
여기서 힘을 길러 당대말기에는 당왕조에 대해 내란을 진압하는 무력원조까지 할만큼 되었고 당왕실에서 이씨 성과 하주정난군절도사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내부항쟁 등도 있었으나 점점 강력해진 탕구트는 송왕조가 서자 일시 복종하긴 하지만 그 뒤에 화해가 성립된다.
이원호시대에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고 대하라는 국호로 건국, 송의 서족 하국이라는 뜻으로 서하라 불렸다. 수도를 흥경부, 지금의 은천에 두었다. 거기에서 서족을 공략하여 토번, 위구르와 전쟁을 벌이고 경주 (무위) , 감주(장야), 마침내는 사주(돈황)까지 빼앗아 하서의 요로를 차지하여 실크로드의 패권을 쥐었다…』 이씨의 눈은 빛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열을 띠었다. 그 동안 취재팀은 차를 들면서 귀를 기울이고 그 뒤에도 서하문자의 제정, 독장령을 내린 일, 승천사탑을 세운 열성적 불교국이었다는 것, 그리고 「칭기즈칸」 의 다섯번에 걸친 공격과 유럽원정에 협력을 거부한 끝에 1227년 마침내 멸망한 일등을 에피소드를 곁들이면서 이야기했다.
그 중에서도 초대황제 이원호에 관한 이야기에 특별히 흥미를 느꼈다. 『이원호는 키 5척남직 정치가·군인으로선 뛰어난 영웅이었읍니다. 영웅은 호색이라지만 그는 7명의 부인을 거느렸읍니다. 게다가 황태자로 책봉한 자기 이들 영령가의 부인이 대단한 미인이었는데 그 여자를 빼앗아서 자기 왕후를 삼아버렸단 말입니다.
그 일에 원한을 품은 아들이 부친 원호를 죽이려고 했지요. 경호원에게 발각되어 죽이진 못했으나 코를 베어버렸읍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원호는 이튿날 출혈량과다로 죽어버린 것입니다』 하는 이야기. 서하 이야기를 하는 이씨는 소년처럼 활기가 있어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부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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