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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g 유광점퍼, 팬심 묶는 가을의 열정이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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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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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팬들에게 유광점퍼는 가을야구와 동의어다. 유광점퍼를 입기 좋은 계절이 10~11월이기 때문이다. 양상문 LG 감독은 넥센과의 준PO에 앞서 “돔구장 기온이 섭씨 30도가 되더라도 유광점퍼를 입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유광점퍼를 입고 열띤 응원을 하는 LG 팬들. [중앙포토]

무게 680g짜리 얇은 점퍼에는 프로야구 LG 트윈스 팬들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유광점퍼의 공식명칭은 ‘춘추 구단 점퍼’.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유광점퍼는 쌀쌀한 가을에 꺼내입는 기능적 의미를 넘어선지 오래다. 유광점퍼는 곧 LG의 가을야구를 의미한다. LG가 정규시즌 4위에 오른 올해 9월까지 2500벌의 유광점퍼가 새로 팔려나갔다. 포스트시즌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난해 판매량의 130%를 기록했다.

9년 동안 가을 야구 실패한 2011년
박용택 “유광점퍼 사세요” 희망 전달
하위권 떨어지면 반값에 중고 거래
2013년 PS 진출하자 1만 벌 팔려
팬과 선수·팀 하나로 묶는 매개체
“스포츠 상품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

비싼 명품도 아닌 이 옷을 LG 팬들은 못 사서 난리고, 못 입어서 한이다. 지난 12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준PO) 미디어데이 인터뷰에서 양상문(55) LG 감독은 “(돔구장 실내 기온이) 섭씨 30도가 되더라도 유광점퍼를 입겠다”고 말했다. 이 말에 LG 팬들은 열광했다. LG는 지난 17일 넥센과의 준PO 4차전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PO에 진출했다. 서울 잠실구장을 찾은 상당수의 팬들이 유광점퍼를 입고 있었다. 전용배 단국대 스포츠경영학과 교수는 “유광점퍼는 국내 스포츠 상품중에서 가장 스토리가 있는 아이템”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2005년까지 LG 선수들은 다른 구단과 마찬가지로 등산복 등에 쓰이는 하이포라 원단(방수·투습이 되는 기능성 섬유)으로 만든 점퍼를 입었다. 그러다 2006년 반짝이는 재질의 점퍼가 첫 선을 보였다. LG패션 디자이너들과 제작사 새시대스포츠가 협력해 폴리에스테르 섬유에 폴리우레탄을 압착한 형태의 점퍼를 개발했다. 당시 현대 유니콘스도 광택이 나는 점퍼를 입었지만 재질이 달랐다.

유광점퍼는 2010년부터 LG 구단 상품으로 일반 팬들에게 판매되기 시작됐다. 판매 초기에는 연간 400여벌 정도 판매되며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봄·가을용과 겨울용, 두 종류다. 유광점퍼의 가격은 공식 제품이 20만원 후반대, 레플리카(보급형)가 10만원 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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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LG 박용택 “올해 꼭 가을야구를 하겠다. 유광점퍼를 준비하라” 큰소리. 유광점퍼가 유명 아이템이 된 계기.

지난 2011년 LG 간판타자 박용택(37)은 “올해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가을야구를 할 겁니다. 얼른 유광점퍼 구입하세요”라고 큰소리를 쳤다. 당시 LG는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9년 동안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상태였다. 박용택은 팬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유광점퍼를 얘기를 꺼냈다. 유광점퍼가 LG의 가을야구를 상징한 건 이 때부터다. 그러나 LG는 그해 8개 팀 가운데 7위에 그치며 팬들을 다시 한 번 실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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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유광점퍼를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선 팬들. 당시엔 두 시간 동안 줄을 서도 사지 못했다.

LG는 2013년 정규시즌 2위를 차지하면서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해 여름부터 잠실구장 상점 앞에는 유광점퍼를 사려는 팬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제작업체는 수백 벌 단위로 추가분을 만들었지만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대량 생산에 들어갔고, 2013년 한 해 동안만 유광점퍼가 1만 벌 이상 팔렸다. 정희윤 스포츠산업경영연구소 소장은 “유광점퍼는 LG팬들의 우월감, 성취감을 과시하기 위해 입는 옷이다. 구단의 상징성을 잘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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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열성팬인 연기자 신소율이 ‘가을이다’라 는 제목으 로2014년 SNS에 올린 사진. 야구장이 아닌데도 유광점퍼를 입었다.

유광점퍼가 항상 빛나기만 한 건 아니었다. 2014년 4월 당시 김기태 감독이 돌연 사퇴하면서 LG는 위기를 맞았다. 성적이 하위권으로 떨어지자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에서는 유광점퍼가 정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하지만 양상문 감독 부임 후 LG는 4위에 올랐고, 유광점퍼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전용배 교수는 “LG가 10년 동안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과정에서 많은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그 애환이 유광점퍼를 통해 투영되고 있다. 이제 유광점퍼는 LG팬이라면 누구나 꼭 갖고 있어야 할 아이템이 됐다”며 “LG 팬들이 날씨가 무더운 늦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유광점퍼를 입는 건 팀에 대한 로열티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광점퍼와 같은 스포츠 상품은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2002년 한·일 축구월드컵 당시 전국민이 입었던 붉은악마 티셔츠는 단기간 인기를 끌었던 품목이다. 그러나 유광점퍼처럼 오랜 기간 동안 스토리를 만들며 판매되는 단일 상품은 드물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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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체육교육 전공 교수는 “유광점퍼는 팬과 선수, 팀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로서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선수들도 관중석에 가득 찬 유광점퍼를 보면 더 잘해야겠다는 자극이 될 것이다. 많은 팀들이 만들어내려고 노력하지만 아무나 이런 아이템을 가질 수는 없다. 지금까지 LG의 유광점퍼가 유일하게 성공한 케이스”라고 말했다.

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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