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에 살다] (32) 날개 꺾인 사나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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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토왕폭 우측 벽을 오르던 송원기 대원에게 위기가 닥쳤다. 발디딜 곳도 없어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송대원의 눈에 소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 소나무는 송대원이 있는 곳에서 2시 방향으로 13m 가량 떨어져 있었다.

그 소나무는 '구원의 나무'처럼 보였다. 그 소나무에 확보점을 마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나무 뒤쪽의 벽은 경사가 완만한 데다 토왕폭 상단 정상까지는 20여m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 소나무까지만 나아간다면 등반은 사실상 끝나는 셈이었다.

어느 순간 벽이 환해졌다. 산안개가 완전히 걷히며 토왕골 위로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달빛을 받은 토왕골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밑에 있던 김성택 대원이 연발하는 감탄사가 송대원에게까지 들려왔다. 토왕골이 보여주는 절대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송대원은 바위 틈에 엉성하나마 두 개의 하켄을 박아두고 구원의 소나무까지 힘껏 건너뛰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니 소나무는 작고 볼품이 없었다. 밑에서 본 소나무가 아니라 다른 소나무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자신과 김대원의 목숨을 걸기에 반 뼘쯤 되는 소나무의 밑둥이 너무 약해 보였다. 그러나 소나무 밑둥에 자일을 건 송대원은 토왕폭 우측 벽 완등이라는 대과제를 자기 손으로 마무리한다는 흥분에 사로잡혔다.

송대원은 밑의 김대원에게 올라와도 좋다는 뜻의 신호인 '하이 빌라'를 외쳤다. 고정자일에 유마르를 걸고 김대원이 올라오는 사이에 손이 빈 송대원은 볼트 설치에 들어갔다. 아무리 뜯어봐도 소나무가 너무 가는 데다 바위 틈에 엉성하게 박힌 두 개의 하켄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볼트 구멍을 거의 다 팠을 때 7m쯤 밑에서 김대원의 해드랜턴 불빛이 흔들거리며 번쩍였다.

'아! 성택형은 역시 빠르구나' 라고 생각하며 볼트를 구멍에 끼우려는 순간, 벨트를 맨 허리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동시에 자신의 몸과 소나무가 벽에서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걸 보았다. 송대원과 김대원은 그렇게 검은 토왕의 벽에서 하얀 달빛 속으로 날았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그게 뭔 헛소리인가? 토왕폭에서 추락하고 있는 김대원과 송대원에게 무슨 날개가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떨어져서는 안될 높이가 있을 뿐이었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높이가 있다.

토왕폭에서 추락하는 것은 토왕폭만한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토왕폭을 오르겠다는 열망과 의지가 쌓아올린 높이만 품고서 김대원과 송대원은 그렇게 높은 곳에서-1973년 1월의 송준호가 그랬듯이-토왕성 폭포 위를 가르는 하나의 물줄기로 떨어져 내렸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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