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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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몇몇 시조를 보면 내용이 공허하거나 자칫 무얼 노래했는지 모를 작품이 멋(?)있는 유행어들로 꽉 차 있었다. 이런 작품일수록 기성인의 사전에서 골랐는지, 아니면 사전에서 찾아냈는지…대충 가려보면 미명, 반개, 미로, 미숙, 예감, 세월, 시름, 연륜 따위다. 암시성과 모호성은 시에서 중요한몫을 차지하지만 어쩐지 신선하지 못하고 역겨움을 느낀다.
『일모의 창』은 시를 대하는 자세가 안정된듯해 마음에 든다. 작지만 작품을 꿰뚫어 가는 통일성이 대견하다. 무명화가, 묵화, 풍경으로 이어지는 관류가 그것이다. 선명도와도 한끈이 닿는다.
『어떤 이별』은 이별의 한 모습이 나직하게 애련을 담고 있다. <기억의 환한 둘레…>라든지, 종장의 표현에서 이별의 진면목과 성숙성을 잘 전달하고 있다.
『보리밭』과 『황토밭』은 제목도, 내용도 유사성이 있어 비교가 된다.
전자는 천적인 시안이 통통 뛰는 듯하고, 후자는 흙내음을 물씬 풍기며 구수한 언어로 리듬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겠다. 그러기에 전자에선 묘미를 얻을수 있어 조금은 감각적이요, 후자는 가슴에 배어드는 감흥 쪽으로 기운다. 그러나 후자는 평이성을 면키 어렵다. 그게 흠이다. 때문에 시의 안목으로 볼때 전자를 택하고 싶다. 왜냐하면 후자는 진행 그 자체로서 끝나지만 전자는 언어 뒤의 이미지가 이농현상의 단면까지를 미루어 짐작할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보리밭』은 이 주일의 가작. <이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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