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파구라도 되었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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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국민들은 바늘구멍 만한 빛이라도 없나 하는 조바심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요즘의 정국 풍경이었다.
그런 속에서 김대중씨는 직선제 개헌을 담보로 자신의 대통령 불출마를 선언했다.
우선 여당의 반응은 냉소 섞인 코멘트와 함께 냉담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씨가 평소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환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라는 혹평도 있었다.
그러나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렸으며 용단을 높이 평가한다』 는 말과 함께 『이를 계기로 개헌 정국에 돌파구가 생겼으면』하는 소망을 피력했다.
국민은 그 어느 쪽 얘기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오늘의 답답하고 난파 같은 정국에 숨통을 터주는 돌파구라도 되었으면 하는 쪽의 바람이 더 클 것 같다. 김씨는 정치포기나 은퇴 선언이 아니고 민주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있다. 그것은 보다 큰 것을 얻기 위한 전략이라는 측면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런 여야의 입장을 떠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나라가 정치권이나 특정 집단만의 나라는 아니라는 점이다. 국민 모두의 나라며 정치도 국민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 국민들의 한결같은 여망이 민주화라는 사실은 누구도 이의가 없다. 직선제냐, 내각 책임제냐에 정치인들이 명을 거는 것은 국민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문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여야는 누가 집권 하느냐에만 정치포석을 집중해 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상황이 바뀌었다.
집권측의 단임 원칙은 그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확인, 재확인 었고 김영삼씨도 일찍 마음을 비웠다고 공언해온 터에 김대중씨 마저 대권에 대한 욕망을 포기했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그와 같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번 믿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집권경쟁의 당사자들이 사심을 버렸다면 이제 정치의 장은 백지로 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다. 다음의 문제는 그 백지 위에 무엇을 담느냐하는 것인데, 그것은 당연히 국민의 소망인 민주화를 이룩하는 일이다. 누가 집권하느냐는 그 다음에 국민이 결정할 일이다.
그 동안 정국을 어지럽혔던 직선제니 내각 책임제니 하는 개헌 논의는 요컨대 자기 또는 자파가 정권을 잡겠다는 욕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고 보아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국민 여망은 권력 구조가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보다 어떤 제도를 채택하건 이것을 어떻게 민주화로 운용하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여야가 할 일은 국민 모두가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민주화를 추진하는 일이다. 민주화란 대의를 위해서는 대화를 못할 이유도 타협을 못할 까닭도 없다. 그런 원칙에서라면 정치 게임이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룰을 마련하는 일도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가 않다.
「민주화」라는 구호는 야당의 전유물이라는 인상 때문에 공연히 여당에 부담을 주는 것도 사실이나 여당은 오히려 훨씬 유리한 고지에서 이니셔티브를 구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도 여야는 더 이상 아집이나 독선에 집착해서 대국을 그르치지 말고 김씨의 선언이 여야 공존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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