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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위기 상황, 키신저 같은 현실주의 전략가 필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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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호 22면

1973년 파리 평화협정 협상 당시 악수하는 레둑토(왼편)와 키신저. 이 두 사람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되었고 레둑토는 수상을 거부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2016년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됨으로써 이제 역대 수상자 수만 900(개인 및 단체)을 넘었다. 매우 드물지만 노벨상을 거절한 경우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꼭 43년 전인 1973년 10월 16일 발표된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그 드문 예이다.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공산당 정치국원 레둑토는 미국과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이 파리 평화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 공동 수상자였던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도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1973년의 노벨 평화상은 시사주간지 타임이 노벨상의 10대 논란거리 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혹평을 받고 있다. 키신저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당시의 문제 제기는 주로 평화주의자로부터 나왔다. 키신저가 캄보디아 등에서 여러 비밀 군사작전을 직접 지시해 전쟁을 주요 외교수단으로 활용했고, 특히 파리 평화협정 협상과정에서 북베트남을 폭격하여 협정에 합의하도록 압박한 권력정치가라는 점에서였다.


평화주의자뿐 아니라 반공주의자와 보수주의자도 키신저가 평화에 별로 기여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파리 평화협정을 체결할 당시 키신저는 미군 철수 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침공하면 미국 공군력으로 북베트남을 응징하겠다고 남베트남에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남베트남은 동남아시아 지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키신저는 미국 내 반전 여론 등의 상황에서 미국의 국익을 비교적 잘 챙긴 것으로 평가될 뿐이다. 키신저와 레둑토의 합의는 결과적으로 북베트남에 의한 무력 통일을 허용했다. 실제 레둑토는 1975년 남베트남 침공을 결정한 북베트남 정부의 정책 라인에 있었다.


[히틀러 요구 받아들여 일단 전쟁 막아]지금으로부터 꼭 153년 전인 1863년 10월 16일은 또 다른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영국의 오스틴 체임벌린이 태어난 날이다. 오스틴은 지금으로부터 꼭 91년 전인 1925년 10월 16일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발의된 로카르노 조약의 체결에 기여한 공로로 192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사실 전쟁·평화와 관련하여 오스틴보다 후세에 더 알려진 체임벌린은 그의 이복동생이자 영국 총리를 지낸 네빌 체임벌린(이하 체임벌린)이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거주 지역을 병합하려 하면서 전쟁 위기가 발생하자, 체임벌린은 협상을 주도하여 히틀러의 요구를 수용했다. 뮌헨협정이 그 결과였다. 뮌헨협정 체결 직후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조금 양보하여 유럽을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뮌헨협정으로 일부 영토를 잃게 된 체코슬로바키아와 영국 내 일부 세력만이 체임벌린을 비판했을 뿐이다. 체임벌린은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선정되지는 못했다. 뮌헨협정의 서명자로는 체임벌린뿐 아니라 달라디에(프랑스), 무솔리니(이탈리아), 히틀러(독일)도 있어서 공동 수상을 해야 했는데, 당시 독일은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법률로 금지하고 있었다. 독일의 군축 위반 사실을 폭로하여 정치범으로 수감 중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가 1935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되자 그의 노벨상 수상은 독일인 전체에 대한 모독이라면서 히틀러가 내린 조치였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체임벌린의 유화적 리더십은 큰 전쟁의 발발 원인 가운데 하나로 비판 받았다. 평화 대신 더 큰 전쟁을 가져다준 양보와 유화의 리더십 사례로 체임벌린을 거론하고 있다. 사실 체임벌린은 전쟁을 무조건 피하지는 않았다. 1939년 독일에 선전포고한 지도자도 체임벌린이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는 먼저 선전포고를 했지만 독일을 봉쇄하는 데에만 주력했다. 실제 군사적 침공은 독일이 먼저 감행했으며 프랑스는 한 달 반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독일을 응징하려면 일찍 했어야 했는데, 독일에게 재무장 시간을 충분히 준 후에야 제재 국면에 들어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영국과 세계를 심각한 전쟁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체임벌린이 너무 민주적이어서 발생한 상황이다. 독일에 양보, 선전포고, 비전투적 봉쇄 등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모두 국민 다수의 의견을 따른 것뿐이었다.


양보·헌신·봉사·희생 등의 평화적 심성만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쌍방이 모두 평화적 심성을 지닌다면 평화가 유지될 수 있겠지만, 평화적이지 않은 상대를 둔 상황에서는 싸울 의지가 충만할 때 평화가 보전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함축하는 대표적인 경구는 4~5세기 로마제국의 군사전략가 베게티우스(푸블리우스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글에서 처음 발견된,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전쟁을 잘 준비함으로써 상대가 도발하지 못하도록 해야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전쟁을 두려워하여 절대로 감행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상대에게는 양보를 잘 하지 않고 도발을 자제하지 않는다.


심지어 평화주의적 국가는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안하여 오히려 선제공격을 더 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평화주의적 약소국은 결과가 힘에 의해 좌우되는 협상의 속성상 유리한 협상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또 평화주의적 약소국은 상대국이 힘의 우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평화적 해결 제의를 거부하고 무력을 선제적으로 사용할까봐 우려한다. 따라서 확전을 원치 않아 상대의 선제 무력도발에는 굴복하고자 하는 평화주의적 약소국은 차라리 선제공격의 이점을 활용하기 위해 먼저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평화비둘기 가설로 불린다.

1938년 9월 30일 런던의 헤스턴비행장에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이 열렬히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우리 시대의 평화를 이루었다”고 연설하고 있다. 체임벌린이 자랑한 히틀러와의 합의문은 종이조각에 불과했다.

[한국, 남베트남처럼 될까 우려의 목소리도]?평화가 누구의 평화냐는 것도 중요하다. 설사 협상을 통해서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거나 종식되었다 하더라도 일부 국가에 그 평화는 최악의 결과일 때가 있다. 체임벌린과 키신저 둘 다 약소국을 희생시켰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 후 신생 체코슬로바키아를 건국하게 하였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회의의 공식 참가국 명단에서 영토 분할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를 히틀러 요구대로 제외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뮌헨회의에서 동맹국 프랑스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해 독일에 영토 일부를 빼앗겼다가 이듬해 전 국토를 점령 당하고 말았다.


키신저 역시 강대국에 의해 만들어진 남베트남이라는 국가를 너무 늦게 포기하면서 전쟁과 통일의 과정에서 수많은 베트남인을 희생시켰다. 동맹은 행동으로 실천되지 못하면 종이에 적힌 글귀에 불과하게 될 수도 있다. 동맹국은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발목을 잡히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이 핵무기를 실전배치할 단계에 거의 이른 것으로 알려지자 대한민국이 1930년대 체코슬로바키아 또는 1970년대 남베트남의 처지로 되어버릴까 하는 우려까지 등장한다. 북한의 요구에 끌려가다 더 이상 양보할 수 없어 전쟁을 벌이게 되는 상황은 체임벌린식 해법으로 부를 수 있다. 반면에 북한 핵의 완전 철폐를 포기하고 대신 북한을 인정해 주는 것은 키신저식 해법으로 부를 수 있다. 어떤 해법이든 한국이 80년 전의 체코슬로바키아나 40년 전 남베트남의 신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을 제외한 주변국이 모두 합의하면 그것은 한국의 체제 존속을 위협하는 모습이 될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전략적 관점을 지니지 못하면 그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주한미군 철수라는 옵션은 늘 미국에 있다. 주변국들과 국익의 공통부분을 증대시키고 조율하는 국가전략이 필요하다.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북한의 선제 도발이든 아니면 한국과 미국의 선제 공격이든, 전쟁 가능성은 현실로 좀 더 가까이 다가온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타협 가능한 옵션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쌍방에게 손해인 전쟁은 약속의 신뢰성 문제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민주국가에서는 약속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구두발표뿐 아니라 법제화를 시행하기도 한다. 자위적 핵무장이 불가피하다는 북한의 주장은 중국의 확장억지가 제공되는 한 인정되지 않는다. 또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는 않겠다는 북한의 주장 역시 신뢰받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는 예방전쟁이라는 대안을 검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 핵무장을 막기 위한 예방전쟁의 적절한 시점은 미국이 실제로 심각하게 고려했던 1994년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북한의 무장화가 덜 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행위자는 최적의 시점이 이미 지나갔다 하더라도 공격하는 게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으면 공격을 선택한다. 예방·선제 공격의 비용과 효과는 충분히 분석되어야 한다. 각종 미사일, 장사정포, 화생방무기, 특수·사이버부대 등 상대의 반격 능력을 상당 부분 파괴할 수 있어야 가능한 옵션이다. 킬체인과 사드 등의 하드웨어 부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략적 계산은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탄두 수, 발사대 수와 위치, 다른 운반체계 등을 모두 따져 최적의 경로를 추출하는 운영분석(OR) 계산뿐 아니라 실패의 비용을 추정하는 리스크 계산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지향해야 할 목적이나 국가이익은 밑으로부터 수렴하되, 정책이나 전략은 역량 있는 지도자가 위에서 수립하여 추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야구에서 작전은 선수가 투표해서 결정하는 게 아니고, 실력 있는 감독이 판단해서 선택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체임벌린과 같은 민주적 지도자보다 차라리 키신저와 같은 현실주의 전략가가 더 필요하다. 미사여구를 곁들인 미봉책보다, 냉철한 이성에 근거한 지속가능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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