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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어주고 싶다, 훌쩍이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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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호 34면

1. 나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닦았다. 그것은 이상한 행동이었다. 나는 코가 나오지 않았다. 코가 나올 것처럼 아까부터 계속 훌쩍이고 있는 사람은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휴지를 꺼내어 코를 닦았을까?


2. 버스 안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닦았다. 그것은 이상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코가 나오지도, 나올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코가 나올 것처럼 아까부터 계속 훌쩍이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코를 훌쩍이는 게 신경 쓰였다. 물론 코 훌쩍임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다. 그는 감기에 걸렸거나 비염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끔 휴지로 닦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의 손이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꺼낸 휴지로 내 코를 닦았을까? 옆 사람 코가 아니라.


3. 나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닦았다. 아무도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 아침, 출근하는 광역버스 좌석에 앉은 승객이 휴지를 꺼내어 가만가만 코를 닦는 모습은 그다지 눈길을 끌만한 행동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코가 나오지도, 나올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코가 나올 것처럼 아까부터 계속 훌쩍이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코를 훌쩍이는 게 신경 쓰인다. 코 훌쩍임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다는 걸 나도 안다. 그가 계속 코를 훌쩍이는 게 좋아서, 또는 훌쩍이고 싶어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코를 훌쩍이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과 결연한 의지로 훌쩍이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는 감기에 걸렸거나 어쩌면 평소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게 계속 훌쩍이고만 있지 말고 가끔은 휴지로 닦는 정도는 얼마든지 그의 의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의 손이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어 코를 닦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어 내 코를 닦았을까? 옆 사람 코가 아니라.


나는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다. 매운 음식이나 뜨거운 국 같은 걸 먹을 때면 매번 콧물이 나와 불편하다. 곁에 휴지를 준비하고 자주 코를 닦아야 한다. 지금은 나름 요령도 생기고 무엇보다 사람이 뻔뻔해져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사춘기 때는 꽤 심각한 고민 중 하나였다. 한번 생각해보라.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하는데, 식사하는 내내 연신 코를 닦느라 쩔쩔매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남자아이를. 촌색시처럼 빨개진 그 아이의 볼과 귀를.


나는 스무 살에 한 여자아이를 만나 비로소 데이트를 했다. 하루는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었다. 물론 나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 콧물이나 훔치는 그런 남자로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의지나 소망을 비웃듯이 그날따라 콧물은 비 오듯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휴지로 가만가만 그러나 부지런히 코를 닦기 바빴다. 여자아이가 그 모습을 보더니 휴지를 자신의 코에 대고 힘차게 코를 풀었다. 그것은 마치 아기에게 음식을 떠먹일 때 엄마가 하는 행동 같았다.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이 엄마인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오물거리고, 씹고, 삼키는. 그 순간 나는 그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물론 그 여자아이는 지금의 아내다.


여러 차례 내가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닦았지만 옆자리 남자는 계속 훌쩍이기만 할 뿐 끝내 코를 닦지 않았다. 그가 나보다 두 정류소 앞에서 내리고 나 혼자 남았을 때 거짓말처럼 콧물 한 방울이 내 코끝으로 흘러내렸다.


4. 버스 안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닦았다. 그것은 이상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코가 나오지도, 나올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계속 훌쩍이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였다. 게다가 그 여자는 아침부터 그 어떤 분하고 슬픈 일이라도 있었는지 코만 훌쩍이는 게 아니라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꺼낸 휴지로 내 코를 닦았을까? 옆 사람의 눈이 아니라. ●


김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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