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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126일 재위 푸미폰, 총리도 쿠데타군도 무릎 꿇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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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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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서거한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의 생전 모습. 이날 태국 왕실 사무국은 “푸미폰 국왕이 오후 3시52분 시리라즈 병원에서 영면했다”고 밝혔다. 장남인 마하 와찌랄롱꼰 왕세자가 왕위를 승계할 예정이다. [로이터=뉴스1]

1946년부터 70년126일간 재위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국가수반인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이 13일(현지시간) 서거했다. 88세. 52년 2월부터 영국을 통치해 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보다 재위기간이 5년 이상 길다.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는 이날 밤 열린 긴급 국가입법회의에서 “푸미폰 국왕이 72년 마하 와찌랄롱꼰(64) 왕세자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며 왕세자의 왕위 승계를 재확인했다.

미국서 태어나 스위스서 유년생활
친형 피격 뒤 왕실 권위 회복 꾀해
10회 군부 쿠데타, 왕권 강화 기회로
태국판 새마을운동 ‘국왕계획’ 성공
국민 신임 두터워 살아있는 신 추앙

태국 왕실 사무국은 이날 성명을 통해 “푸미폰 국왕이 방콕 시리라즈병원에서 평화롭게 영면했다”고 발표했다. 태국 정부는 1년간을 애도기간으로 정하고 30일 동안 모든 축제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내가 죽어서 국왕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며 시리라즈병원 앞에서 푸미폰 국왕의 쾌유를 빌던 국민은 비탄에 빠져 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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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미폰 국왕은 32년 입헌혁명으로 입헌군주제가 실시되면서 상징적 존재로 실추된 태국 왕실을 태국 정치의 막후 실세로 만들었다. 그 바탕에는 푸미폰 국왕의 뛰어난 정치력이 있었다. 그는 ‘태국판 새마을운동’인 ‘국왕개발계획’으로 농촌 부흥을 이끌며 국민 사이에서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받을 정도로 지지를 얻었다. 군부 쿠데타를 교묘히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며 정권이 수차례 교체되는 혼란 속에서도 왕실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푸미폰 국왕은 27년 아버지 마히돌 아둔야뎃 왕자가 유학 중이던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듬해 태국으로 돌아왔다가 33년 스위스로 건너가 학교를 다니며 45년까지 유년기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 시기 첨단 기술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였던 푸미폰 국왕은 대학에 진학해 과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국왕이던 친형 아난타 마히돌이 46년 침실에서 의문의 총격을 받고 숨진 채 발견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18세였던 푸미폰 국왕은 태국에서 아난타의 장례를 마친 뒤 왕위를 승계했다. 그러나 삼촌 랑싯 프라유라삭디에게 섭정을 맡기고 스위스로 돌아가 전공을 정치학으로 바꿨다. 이때부터 그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땅에 떨어진 태국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푸미폰 국왕은 스위스 로잔대에서 4년 동안 학업을 마친 뒤 귀국해 50년 대관식을 했다.

푸미폰 국왕이 즉위하던 당시 태국 왕실은 아무 실권이 없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다. 32년 입헌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쁠랙 피분송크람 장군이 그동안 태국의 정치체제였던 절대왕정을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면서 권력을 군부에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푸미폰 국왕은 잇따른 군부 쿠데타를 왕권 강화의 기회로 삼았다. 57년 왕실의 복권을 조건으로 사릿 타나랏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이 쿠데타로 피분송크람 장군이 밀려나면서 푸미폰 국왕은 약속대로 절대왕정 시기의 권한과 부를 상당 부분 돌려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국왕개발계획’ 실시에 나섰다. 그는 69년부터 지방의 낙후된 농촌 지역을 직접 시찰하며 농민들을 만나 고충을 듣고 왕실 소유자금을 투입해 농촌 개발사업을 실시했다. 수력발전소 건설부터 황무지 개간, 농업기술 연구, 벽지 의료단 파견 등 다방면에 걸친 지역 개발사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푸미폰 국왕은 국민의 확고한 지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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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태국 국민들. [로이터=뉴스1]

이 같은 국민의 지지는 즉위기간 동안 10여 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나며 정권이 수시로 바뀌는 가운데 푸미폰 국왕이 입지를 굳힐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세력 입장에선 푸미폰 국왕의 승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푸미폰 국왕이 지지한 쿠데타는 성공하고 거부한 쿠데타는 실패했다. 81년과 85년 잇따라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푸미폰 국왕은 이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두 차례의 쿠데타 모두 실패로 끝났다. 2001년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로 총리직에 올랐던 탁신 친나왓이 5년 만에 쿠데타로 실각한 것도 푸미폰 국왕과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푸미폰 국왕의 권위는 92년 ‘검은 5월’ 사태에서 절정에 달했다. 92년 수친다 크라프라윤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반대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자 반정부세력이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나면서 태국은 내전 직전 상태에 돌입했다. 이때 푸미폰 국왕은 수친다와 반군 지도자 참롱 스리무앙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들여 평화협정을 중재했다. 이후 수친다는 협정에 따라 물러났고, 태국 의회는 즉시 총선을 실시해 민주정부를 수립했다. 군부 지도자와 반군 지도자가 왕실 규범에 따라 국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당시의 사진은 정파를 초월하는 국왕의 권위를 여실히 보여 주는 장면으로 꼽힌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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