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명의「좌경·용공」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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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가「좌경」·「용공」세력을 뿌리뽑기 위해 수사대상으로 삼은 인원이 30여 개 단체 1만 여명이라고 밝힌 데 대해 우선 놀라움과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그 동안 주로 학원 가를 중심으로 간헐적으로 나타났던 좌경 구호들은 남북분단의 현실을 망각한 일부 젊은이들의 행동이려니 생각했었다.
대학 캠퍼스 안에 북괴의 신문이나 방송 내용을 그대로 베낀 벽보가 버젓이 나붙었을 때도 그것이 설마 우리 학생들의 소행일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북괴의 간첩 따위가 한 짓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당국자의 발표는 1만 여명을 좌경·용공 분자로 지목하고 수사를 벌인다고 한다. 한마디로 어느 사이에 이토록 엄청난 불순세력이 우리 사회 안에 확산돼 있었는가 당혹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많은 수의 좌경·용공세력이 자리를 잡고 활동하고 있다면 그 세력이 이토록 확산되기까지 수사당국은 그 동안 무엇을 했느냐 하는 핀잔을 면할 수 없다.
대공수사는 어느 특정한 시기나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상시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꺼번에 30여 개 단체 1만 여명의 좌경·용공세력을 일시에 파악해 내고, 한꺼번에 수사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은 얼른 납득이 안 된다. 용공·좌경이 확산되기 전에 싹부터 움트지 않도록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수사나 제재과정에서는 좌경·용공의 성분을 구분하는 엄밀성이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우리의 국가적 현실이 반공을 표방해야 할 처지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북괴의 적화통일이나 이를 위한 내부 선동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노선의 주장이나 동조를 묵과하거나 방관할 수는 없다. 이는 철저히 색출하여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수사와 제재에만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공연한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될 것이다. 예컨대 어떤 단체가 수사대상이 됐을 경우 이에 소속된 모든 사람을 불순분자로 몰아붙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반대로 어느 특정 개인이 좌경·용공분자라고 해서 그가 소속된 조직이나 단체 전체를 같은 성향의 집단으로 간주하는 일도 무리다. 1만 명이라는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엄밀한 수사와 공정한 판단에 의해 그 범위를 최소화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사안의 중요성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일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해 놓을 경우 국민들의 불안감이 생긴다면 오히려 역작용의 우려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반정부」적 행동을「반 국가」적인 것으로 몰아붙인다거나, 단순한 수동적 추종을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주도로 확대 해석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될 것이다. 요컨대 옥과 석의 구별은 공정하고 엄밀해야 한다는 얘기다.
북괴의 남침으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비극이 휴전으로 중단된 지 3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 발전을 누리며 그 상흔을 씻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제 새삼스럽게 좌경·용공세력의 확산을 걱정하게 된 우리 현실에 대해서도 근본적이고도 숙연한 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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