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임난야사「조선일일기」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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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구주서부 대분(오이타)현, 온천으로 유명한 별부(벳푸)시에서 택시를 타고 한적한 시골길을 20분쯤 달리면 안양사란 절이 나온다. 이 절에 우리에게도 중요한 임난기록인『조선일일기』가 보관돼있다. 정유재란 당시 의승 경념(게이넹)의 기록인데 지금까지 이 절에서 원본의 공개를 거절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재일사학자 신기수씨의 노력으로 처음 공개된 것은 뜻 깊은 일이다.
정유재란(1597) 당시 구주남부지방 녹아도(가고시마·그당시는 살마-사쓰마-라 불렀음)의 성주인 도진(시마즈) 의홍이 이끈 5만군의 부대가 남원·사천격전에서 만용을 부렸다. 이들은 잔인 무도하게도 아군 및 일반비전투원 3만8천7백명의 목을 베었는데, 강홍중의『동사록』에서도「홍왜군(살마군) 최악」이라 통박하고 있다.
전후에도 우리동포를 가장 많이 끌고 갔다. 오늘날 그들 살마군의 장수들이 쓴 전쟁 기록은 다량으로 녹아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일방적으로 아전인수격이고 객관성이 없는 기록이 대부분이어서 학문적으로 큰 참고자료는 못된다.
그러나『조선일일기』는 이와 대조적으로 전쟁의 체험을 비교적 솔직하게 담은 기록물이어서 주목된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왜군 제2부대는 남한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당시 모리(모리)수원을 총지휘관으로 하고 가등(가토)청정, 흑전(구로다)장정, 천야(아사노)행장 등 장군이하 5만군의 총무를 맡은 구주 구저(우수키)의 성주 태전(오다)비탄수일길은 그의 측근에 의승인 경념을 종군케 했다.
경념은 이 부대를 따라다니며 보고 겪은 내용을『조선일일기』로 남겼다.
이 일기의 원본이 경념이 주지로 있었던 대분현 구저시 안양사의 보물로 보존되어있다. 원본은 비장된채 1964년 그 내용이 등사본으로 처음 공간되었다가 이듬해 나량 천리대에서인쇄됐다.
경념은 본시 원주(도수·지금의 정강현)의 성주 안등(안도) 모의 아들로 태어나 출가, 우연한 인연으로 구주의 구저로 오게되었다. 그곳 성주인 태전비탄수일길의 신임을 얻어 안양사를 건립해 받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성주의 명으로 의사로서 종군했고 귀국후 10년만에 세상을 뜨니 78세였다.
그는 정유년6월24일, 구주의 좌하(사가)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가 이듬해 2월 귀국했다. 그사이 약9개월간 종군하면서 극렬한 전쟁의 상황을 매일 기록하면서, 군데군데 일본 전통가요인 화가(와카)체로 노래 약3백30수를 곁들여 놓았다. 노래 내용은 진종의 승려로서 신앙의 기쁨과 슬픔을 읊은 것이 약70여수, 사향심과 가족의 안부를 근심한 노래 또한 약70여수, 그리고 전쟁의 가혹·잔인·비참함과 야수성을 통분하고 비탄한 노래가 약90여수다.
여기엔 전쟁에 대한 비판과 평화로운 세계에의 기념이 애절하게 담겨 있다. 나머지는 종군중의 풍물, 타국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감회를 읊고있다.
이 일기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첫째 이 일기에서 전쟁의 이면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그당시 조선출전을 일본인 대부분은 원치 않고 있었다. 포로를 송환코자 조선정부에서 파견한 사절들의 기행에 적혀 있는 서민들의 불평 불만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증빙이 되기도 한다.
일본에서도 전쟁의 비참한 실상이나 출진한 강수들의 불만, 물자의 부족, 기후의 악조건 등으로 얼마나 큰 곤란을 겪었으며 그들이 또한 얼마나 전쟁을 증오하고 본국귀환을 갈망했던가에 대한 소상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이 기록만은 이런 내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기에는 왜군과 인부, 그리고 많은 조선민중이 얼마나 고난과 고통에 허덕이고 있나를 적나라하게 그려놓았다. 그중에도 남원성전투 전후의 기록(8월5일∼8월11일)이라든가, 울산축성의 난공사, 상호공방전의 치열함(11월11일∼1월4일) 등은 주목할만 하다.
경념과 같은 부대의 부대장인 대하(오가와)내수원이 쓴『조선기』(대하내물어)가 지나치게 과장하고 용감·비장하게만 기록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경념의 일기는 그 진지하고 솔직함에 독자로 하여금 현실감을 느끼게 한다.
다음은 일기의 한대목(8월5일∼8일).
『동5일, 집과 집을 불태워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읊는다.
-적국(전라도를 이름)이라 하니 불타는 연기 오름은 불꽃인가 여기네-.』
『동6일, 들도 산도, 성은 말할 것도 없고, 모두 불타버리고, 사람은 칼로 베고, 쇠사슬·죽통으로 목을 조르니, 어버이는 자식을 탄식하고, 자식은 어버이를 찾는 가여운 모습을 처음 본다.
-들과 산을 불태우는 무자들의 고함소리, 마치도 수라장같구나-.』
『동7일, 여러가지로 사람마다 난폭한 행동에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은 돌이켜 보니, 내마음의 어리석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구나. 이래서야 어찌 왕생을 이룰손가.
-부끄럽구나, 보는 물건마다 가지고 싶은 마음이 더해지는 망념의 몸이여-.』
『동일, 너무나 너무나 내마음을 돌이켜보니, 어리석음을 느낀다. 그러나 죄업심중도 무겁지 않고 산난방일도 버리지 못하니(미타의) 다짐 때문이로다.
-아마도 미타의 다짐을 믿지 않은들 이 악심을 뉘라서 구하리-』
『동8일, 고려의 아이들을 포박하여 부모는 칼로 베어 다시는 서로 보지 못하게 하니 서로의 탄식은 마치 옥졸의 짓과 같다.』이렇게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것을 보고, 『무사들에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타이른들 그들의 탐욕심은 버리지 못하는구나』『밤새내내 돌을 끌어다 성을 쌓는 것은 오직 그들의 탐욕심 때문이다』(11월14일) 라고 슬퍼하고 있다. 또 대소명(크고 작은 영주)에서 일반무사에 이르기까지 전공을 다투어 살륙과 약탈을 자행하는 것 또한 모두 인간의 탐욕심 때문이라며 자계와 탄식이 지면에 넘쳐흐르고 있다.
왜군이 한국에 출전하는데 뒤따라 많은 상인도 함께 나왔다. 그중에는 우리나라 민간인을 마구사서 외국인에게 팔아넘기는 극악무도한 악덕모리배도 있었는데 이에 관해서도 일기는 언급하고있다.
즉 경념이 처음 부산항에 상륙해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이러한 자들의 행태였다.
『많은 장사치가 귀천노약할 것 없이 법석대고』(7월8일) 있었는데 이자들은『일본서 건너온 각종 상인』(11월9일)이며, 그중에는『사람을 사는 자가 와서 행군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남녀노약을 사서는, 노끈으로 목을 묶어 한테 모아 앞으로 몰아가는데 걷지 못하면 뒤에서 막대로 내몰고, 때려서 달리게 하는 광경은 마치 아방나찰이 죄인을 문책하는 모양이 이와 같지 않나 하고 여겼다』(11월19일)고 적고 있으니 이 처참한 현장은 왜군이 강제로 끌고간 만행과 함께 4백년이 흐른 오늘에 있어서도 새삼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남한일대를 점령하고 각도를 적국(전라도)·청국(충청·경기도)·백국(경상도)이라는 이름으로 색별해 불렀는데 이중에도 중요 점령지역은 충청도 이남이었다. 경념이 종군한 부대는 부산에서 서진하여 전라도 남원에서 대전을 겪었으며 다시 충청도로 북상하려다 가을·겨울의 추위를 고려해서 영천·경주·울산으로 갔다.
이때가 10월8일. 10월12일부터 울산축성이 시작되어 11월말 완성됐다.
12월22일부터 선·명연합군의 급습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1월4일 겨우 전쟁은 일단락 되고 경념은 6일 울산서 승선, 부산을 거쳐 2월2일 귀국했다. 친난교신앙자인 경념의 일기는 우리도 일독할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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