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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일용직 칠장이…6m 뮤직비디오 세트장 재현해 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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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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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박경진 씨가 수상작인 ‘현장’ 앞에 섰다. 일용직 칠장이로 일한 뮤직비디오 세트장을 현장처럼 재현했다. 강정현 기자

5년 전 성균관대 대학원 미술학과를 수료한 박경진(34)씨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세트장 칠장이로 들어갔다. 영화나 뮤직비디오를 찍는 촬영장은 대체로 둥근 홀이었는데 판자로 가설된 그 공간을 진짜처럼 보이도록 칠을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때로 다음 날 새벽까지 현실과 흡사한 모습을 만들어내던 일용직 박 씨는 화실로 돌아와 생계용 가짜 그림을 반전시킬 자신만의 작업을 시작했다. 10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제38회 중앙미술대전 시상식에서 대상(상금 1000만원)을 받은 박씨는 “화업(?業)과 생업을 이어달리는 현장 밀착형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제38회 중앙미술대전 시상식
박경진씨 ‘현장’ 최고 영예
아침부터 새벽까지 일한 뒤
화실로 돌아와 자신만의 작업

수상작인 ‘현장’은 세로 4m 88㎝, 가로 6m 50㎝ 대작이다. 관람객이 세트장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체험을 위해 다섯 폭 캔버스의 좌우를 병풍 치듯 둥글렸다. 설치에 공들인 효과가 난다. 수십 명 작업조가 각기 제 소임에 매달려있는 모습이 생생하다. 분초를 다투는 현실의 반영일까. 제대로 들여다볼 엄두가 안 나는 사람들 얼굴은 죄다 뭉개졌다. 최대한 진짜처럼 보이도록 칠을 하지만 가짜인 세트장과, 가짜 현장을 캔버스 위에 진지한 회화로 고착시켜 탄생한 진짜 세트장 사이의 긴장이 팽팽하다. 자신이 잘 아는 것을 그리는 자신감 넘치는 붓질이 보는 이 눈을 시원하게 끌어당긴다.

“어릴 때 재래시장에서 생선좌판을 벌였던 어머니를 도우며 자랐다. 짓이겨진 생선 내장 조각이 얼굴에 튀며 풍기던 비린내가 지금도 코끝에 걸려있다. 작가로 살기 위해 일하는 촬영세트 현장에서 그 비린내를 맡는다. 작업과 생활 사이에 생겨난 갈등을 봉합해가며 지켜왔지만 흠이 나고 틈이 생기는 것, 그 한계를 의식하는 것이 내 그림의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어머니는 지금도 아들이 돈 안되는 미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가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면 안 되겠니”라 하신다는데 이번 수상으로 그 질문에 작은 쐐기를 박게 됐다고 기뻐했다. 작가는 금천예술공장 입주 작가로 지내는 요즘, 동굴 같은 개인 작업실에서 걸어 나와 동료들과 나누는 대화가 힘이라고 했다. 내년 개인전을 앞두고 ‘현장’을 더 현장처럼 구성할 수 있도록 보다 큰 작품들에 도전하고 있다.

운영위원 대표인 정현 인하대 교수는 “올해 중앙미술대전은 회화의 다양성, 설치미술의 개념적 접근, 역사와 기억을 재해석하는 영상물이 흥미로웠다”고 평가했다. 정 교수는 “오늘의 미술은 작가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 또는 작용이 관객에게 미학적 의미를 던져준다는 점이 중요하다”며 “그런 점에서 이번 선정 작가전은 그룹전으로 보일 만큼 관계 맺기가 도드라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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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미술대전 후원사인 포스코 황은연 사장(왼쪽)이 우수상을 받은 전형산씨에게 상장을 수여했다. 강정현 기자

우수상(상금 500만원)은 일상의 소음을 능숙한 공학과 기술 처리로 매력 있게 시각화한 전형산(32)씨의 ‘관계없는 관계 #2’가 받았다. 올 중앙미술대전에는 수상작가인 박경진·전형산 작가외에 김정옥·김현주·박석민·범진용·신승주·안유리·이지연·정지현 씨 등 선정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17일까지. 포스코 후원으로 입장료 무료. 02-2031-1919.

심사평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우리 미술 다양성 넓혀

◆고원석(전시기획자)=1차 포트폴리오, 2차 프레젠테이션 심사로 선정된 10명 작가 중 다수를 차지한 분야는 회화였다. 풍경은 여전히 중요한 주제임에 틀림없었으나 이들의 풍경 속에는 동시대에 대한 번민이 엿보이기도 했다. 풍부한 상상력과 상당한 표현역량을 갖춘 매력적인 회화 작업이 많았다. 영상 작업은 회화적 형식을 적극 도입하면서 풍부한 사운드를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동시대적 현실 이면에 숨은 상상력을 소환했다.

◆공성훈(화가)=올 선정작가들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며 우리 미술의 다양성을 넓혀주는 귀중한 작가들이라고 생각한다. 몸을 자연과 세계에 얽어맨 듯한 흥미로운 그림(김정옥), 샤먼으로서의 예술가 역할(김현주), 생계를 위해 일하는 현장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 계획의 긴장 또는 어긋남(박경진), ‘날 것’ 같은 힘이 있는 표면(박석민), 회화기술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장점(범진용), 설치작품에 사용하는 다양한 매체나 재료를 세삼하게 다루는 솜씨(신승주), 함축적이고 시적인 영상이 매력(안유리), 신화와 모험담 등을 조합한 화면이 뛰어난 회화(이지연), 공학과 기술의 능숙함이 조직한 기계작품(전형산), 명암이 섬세하며 색감이 풍부한 흑백 화면(정지현).

◆안소연(미술비평가)=회화에 대한 동시대의 관심사가 크게 반영되었던 반면, 최근 국내 미술 현장에서 뜨거운 쟁점을 이끌어온 디지털 무빙이미지나 퍼포먼스, 회화에 대한 형식 탐구, 화이트 큐브 디자인 등의 화두가 지원자들 작업에서 많이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다. 선정작가들은 동시대 미술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며 자신들의 방법론을 모색해 가는 태도가 돋보였다. 동시대 미술의 각축장에서 의미 있는 성취를 계속해서 보여주길 바란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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