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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글로벌·채텀하우스·여시재 포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북한이 문 열고 나올 때 유라시아 협력 완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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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

홍석현 중앙일보ㆍJTBC 회장은 10일 J글로벌ㆍ채텀하우스ㆍ여시재 포럼 개회사에서 “섬처럼 고립된 북한이 문을 열고 나올 때 유라시아 협력은 완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홍 회장은 이어 “북한의 잇단 핵실험 여파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강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북한의 비핵화와 개방을 유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며 “얽히고 설킨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는 알렉산더의 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개회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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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사 전문

인간의 삶이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어떤 역사적 흐름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최근까지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그 거대한 시대적 물결로 우리는 ‘세계화’라는 용어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세계화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간단히 말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교류와 통합의 현상’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화가 지향하는 지구 공동체의 이념은 상호 이해와 호혜적인 교역의 확대를 통해 우리 모두가 발전하고 또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임마누엘 칸트가 꿈꾸었던 영구 평화의 이상을 달성하는 것 또한 그리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기후 변화의 위기에 공감하며 하나 뿐인 지구를 보전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머리를 맞대고 협력의 길을 모색하는 자세에서 우리는 바로 그런 평화와 발전의 가능성에 대한 싹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적지 않습니다. 이익을 쫓아 전 세계를 떠도는 투기성 자본, 오로지 이윤의 극대화만을 노리는 일부 다국적 기업의 횡포 등 세계화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특히 선진국의 패권적 지배를 강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러한 세계화에 대한 반감은 과거 제3세계 국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됐었습니다. 한데 최근엔 전혀 새로운 세계화의 반대 세력이 나타나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이제까지 세계화를 주도해 왔던 두 선진국의 변신입니다.

미국은 이번 대선 레이스를 통해 노골적으로 보호무역주의와 신고립주의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영국은 지난 6월 유럽연합(EU)에서의 탈퇴를 선택해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습니다. 이 같은 놀라운 변화의 저변엔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계 성장의 엔진 역할을 하던 중국은 고속 성장의 시대를 마감하고 중속 성장으로 키를 전환하면서 이젠 이것이 ‘새로운 정상 상태’란 뜻의 ‘신창타이(新常態)’, 즉 ‘뉴 노멀(New Normal)’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Christine Lagarde)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얼마 전 세계 경제가 ‘저성장의 덫’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일각에선 최근의 국제 환경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0년대와 비슷하다는 점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1929년 미국의 주가 폭락으로 대공황이 촉발되자 각 열강이 오로지 자국의 경제 회복만을 위해 보호무역의 장벽을 높이 쌓았던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최근의 세계 경제 또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각국이 이런저런 울타리를 치는 것으로 그 어려움에서 빠져 나오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1930년대의 대공황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전쟁으로 인해 비로소 해소됐다는 견해가 제기되듯이 지금의 글로벌 경기 침체 또한 전쟁과 같은 극단의 상황이 발생하고 난 뒤에나 풀리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 참혹한 역사의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이 곳엔 유럽과 아시아, 즉 유라시아의 대표적인 석학들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유라시아 대륙은 넓은 의미로 유럽과 아시아를 포괄하며 지구촌의 40% 면적에 70%의 인류가 거주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대륙입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곧 세계를 지배합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유라시아가 어떻게 협력하느냐 여부에 따라 세계의 운명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마침 유라시아에 속한 각국은 눈을 높이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며 협력을 지향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중국의 서진(西進)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과 러시아의 신동방정책,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이 모두 유라시아의 동과 서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라시아 각국에겐 이제 서로의 이해 관계에 따른 충돌이 아니라 비전을 공유하고 제도와 질서를 공동으로 쌓아올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북극 얼음이 녹으면서 새롭게 열릴 북극 항로도 유라시아 협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입니다. 현재는 4개월만 선박 운항이 가능하다지만 2020년이면 6개월, 2030년이면 1년 내내 운항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길이 생기면 사람과 물자가 다니게 되고 이에 따라 마음과 이야기가 오가며 마침내는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유라시아가 침체된 세계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한데 유라시아의 협력엔 하나의 큰 걸림돌이 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북한입니다. 두 가지 점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개발이 유라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면 북한의 고립은 유라시아의 네트워크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유라시아 동쪽의 ‘단절 구간(missing link)’과도 같습니다.

저는 지난 여름 한국의 지성 47인과 함께 러시아의 극동 연해주를 방문했습니다. 그 곳에서 중국의 흑룡강과 러시아의 우수리강이 만나 함께 흐르는 커다란 강을 보았습니다. 그 강을 몽골 사람들은 아무르강이라 부르더군요. ‘아무르’는 몽골어로 ‘평화’라고 합니다. 실핏줄 같은 여러 강물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물줄기로 변해서는 평화라는 뜻을 가진 아무르강이 된 것입니다. 이를 보며 우리 방문단은 북한을 포함한 유라시아 각국이 협력해 아무르강과 같은 ‘평화의 합수(合水)’를 일궈냈으면 하는 애끓는 바람을 가졌습니다.

섬처럼 고립된 북한이 문을 열고 나올 때 유라시아 협력은 완성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북한의 잇단 핵실험 여파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강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북한의 비핵화와 개방을 유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의 지혜가 더욱 더 절실히 요구됩니다. 얽히고 설킨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는 알렉산더의 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빛나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조문규·한영혜 기자 han.youngh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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