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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을 생각한다|새 연재소설… 작가는 어떻게 구상하고있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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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작가 황석영씨는 이달중에 중앙일보에 주간연재할 소설민족생활사『백두산』의 집필을 앞두고 그 웅대한 구상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광활한 대륙에서 펼쳐질 우리 민족의 흥미 진진한 삶의 기록을 그는 과연 어떻게 써내려 갈것인가. 그의 구상과 의도를 직접 들어본다.
70년대에서 8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10년동안 써왔던 소설『장길산』이 끝난지도 어느덧 두 해나 지났고, 80년대도 중반을 넘어섰다.
내가 한국 민족생활사를 민담식으로 재구성 해보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장길산』을 잠시 중단하고 있었던 80년부터 82년 사이의 공백기간중의 일이었다. 개인적이건 사회적이건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에는 반동의 흐름이 있게 마련인데, 이것은 사람과 역사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변화에 있다는, 너무도 유명한 명제에 걸맞는 현상이기도 하다.
즉, 당시가 70년대와 80년대 사회의 변화의 분수령을 만나던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10년간 한가지 작업에 시달려온 내 개인에게도 반동적인 기간을 거쳐서 여러가지 변화를 일으켰던 때였기도 하다. 뭍에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면 끊임없이 한 흐름으로 밀어붙여 오던 파도가 다른 물결의 역류에 부닥치면서 서로 고양되어, 드디어는 큰 갈등의 고비를 만들었다가 더욱 거세게 산산이 부서져 내리면서 치밀어 달려오는 골을 보게 된다.
지금 나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생애의 절반이상을 이미 살아버린 세속의 중년으로서 이러한 갈등의 물굽이 위에서 있다고 느낀다. 생으로서의 위기감은 어디서 오는걸까. 그것은 바로 문학이 점점 더 어려움과 고통을 요구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아가기 때문인가.
쓰고있는 문장 한줄 한줄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는지, 무력감과 덧없다는 생각때문에 소설 쓰기가 힘들다던 동료 작가들의 고백이야말로 당대 지식인들의 자기 계급기반이 전혀 형성되어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한국의 산문은 동시대 사람들의 삶 앞에서 과연 떳떳하게 서있는가 하는 회의가 글 쓰기 힘들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지금 이시대에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하는 것을 여러가지로 점검하고 밝혀내는 일이 글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기 위한 우선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물론 내가 하고픈 작업은 여러갈래가 있다. 베트남 전쟁을 아시아인의 시각으로 재정리할 장편『무기의 그늘』을 끝내야 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지난10년을 보낸 호남지방과 광주에서의 여러 경험들을 바탕으로 장편소설을 마무리 지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잠시 젖혀두고『백두산』을 쓰려고 작정한것은 우선 나의 글쓰는 작업의 큰 뼈대를 세워놓기 위해서다. 물론 내가 가정한 기간인 10년 세월은 한반도에서는 다른 나라의 1백년에 해당하는 격심한 변화의 세월이 될지도 모르며, 내가 그 기간에 흔들림없이 작업을 하겠다는 것은 이러한 모든 변화를 예감하고 그 변화까지도 당대인의 시각으로 담아내겠다는 각오가 섰기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 사회의 진통은 어디까지나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를 성립시키고 말겠다는 자기 표현이며, 민족자주문제는 각계에서 날카롭게 거론되고 있다.
새로운 민족이념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들이 여러 가지 실천적인 행동과 작업으로 표출되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는 동북아시아사 속에서 민족사를 통시적으로 파악해야될 시점에 와있다.
나는 지금까지 사회 각계층에서 획득한 시대 인식의 결과들을 바탕으로 과거를 재구성하고 현재의 시각에서 그것들을 대중화시키려한다. 역사란「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잘 알려진 명제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살아온 궤적을 더듬어 보려는 것은 지금 여기서의 삶이 스스로의 과거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데 대한 응답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자주적 통일을 갈망하는 80년대 한국사회의 당연한 역사적 산물이다.
우리는 한 흐름으로 파악해서 읽을 수 있는 대중적 역사책을 가지고 있지 못한데, 학문적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 다루어 온 논문이나 학생들이 입시용으로 읽어온 참고서가 대부분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담이나 궁중비사 따위의 한계를 넘지 못하여 애초부터 과학적인 역사의식이나 과거의 보편적인 백성의 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대개가 과거의 역사를 통시적 흐름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연대별 사건별로 암기식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이는 구왕조 시대에는 그러한 기록의 담당자나 독자가 지배계급 자신이었고, 그 뒤에는 일제에 의한 민족적 역사의식의 말살기 였으며, 이제는 그러한 연장 선상 속에서 민족 분단의 위기의 시대에 살게 됨으로써 올바른 역사의식을 공유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인듯 하다.
역사란 이제 한국사회에 있어서 실증적 과학이라는 학문적 대상의 단계를 넘어선 실천의 영역임을 시대가 엄중하게 요구하고 있다. 단재가 국치에 발분해서 비역사 비소설인『대동사천년사』를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다 중단했었지만, 나도 그와 같은 뜻을 잇겠다는 결심으로 내 중반기의 산문정신을 여기에 모두 쏟아 넣을 뜻을 가졌다.
작년에 동경에 머물고 있을적에 중국문예지에『장길산』이 연재되고 있었고 그런 연줄로 북경대학쪽과 문예협회쪽의 주선으로 백두산에 가볼 기회가 있었건만 성사되지 못하였다. 소설(?)민족생활사『백두산』이라고 제목을 달아 두었으니 백두산은 동북아시아사의 상징적표상일뿐 아니라 갈수없는 분단의 저너머에 있는 민족의 고향이다.
실로 백두산을 기점으로 하여 그 흐름이 태백산맥에 이르면서 우리들의 삶이 이어져왔던 것이다. 백두산이 머리라면 태백산맥은 척추인 셈이다. 백두산은 국토에 속속들이 뻗어있는 우리살림터의 구체적 맥의 조종을 뜻하면서, 동시에 살아온 이들의 얼을 담고있는 상징인 것이다. 어찌보면『장길산』이 돌멩이나 들풀처럼 이리저리 부대끼며 끈질기게 살아온 이땅의 무지렁이 백성들에 대한 10년에 걸친 서술의 결과라면,『백두산』은 과거를 통하여 앞으로의 민족이념을 어떻게 형성해 나갈 것인가 하는 동시대인의 꿈과 고통을 담아내야할 작업이다.
어떻게 이 먼 길을 떠날까.『무지는 역사가의 제일요건』이라는 말처럼 이 글은 상식의 재창조에 역점을 두어야겠다. 아직 안개 속만 같고 사회과학의 훈련도 제대로 받지못한 필자로서는 자신의 인생을 겸허하게 바치는 심정으로 이 먼 길을 떠나려 한다. 이 작업이 끝날제 어느덧 필자는 노인이 되어있을 것이며, 백두산도 구체적으로 우리가 오를 수 있는 산이 되어 있을는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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