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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中 '영화황제' 한국인 김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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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김염(金焰.1910~83)을 아는가. 지금도 13억 중국인으로부터 '영화 황제'로 불리는 한국인 배우로 중국 영화사 1백여년 동안 그런 수식어를 가진 연기자는 오직 그뿐이다.

중국 정부와 신화사 통신이 1995년 공동으로 펴낸 '중화영성'에는 그간 중국 영화계가 배출한 최고 스타들이 실려 있다. 책의 맨 앞에 기록된 배우가 바로 김염이다. 전설적 액션 스타 이소룡과 현재 할리우드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는 리롄제(李連杰).장만위(張蔓玉).궁리(鞏)보다 비중있게 소개됐다.

뿐만 아니다. 그는 1932년 중국 영화전문지 '덴성(電聲)'이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장 잘 생긴 배우''가장 친구가 되고 싶은 배우' 등 전 분야에서 1위.

요즘 충무로에 견주면 설경구.장동건.차태현 등을 한데 모아놓은 것쯤 될까. 마오쩌둥(毛澤東)은 비공산당원인 그를 '국가 일급배우'로 임명하기도 했다. 행정상으로 장관보다 높은 대우였다.

그런 김염이 '상하이 올드 데이스'를 통해 오롯이 되살아났다. 한국 사회에서 거의 잊혀진 인물이었던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복원된 것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저자 박규원(49)씨가 김염의 외손녀라는 점. 평범한 주부였던 박씨는 지난 8년간 관련 자료를 모으고, 중국도 열 번 넘게 다녀오며 그의 발자취를 퍼즐 조각 맞추듯 정리했다.

박씨는 "8년 전 친정 나들이를 갔다가 어머니로부터 외할아버지의 얘기를 처음 들었다"며 "96년 KBS '일요스페셜'에서 방영된 것을 빼곤 그에 관한 기록이나 저서가 전무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상하이 올드 데이스'에는 1930년대 상하이를 중심으로 이역만리에서 스크린 열정을 불태웠던 김염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1910년 서울에서 한국 최초의 양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필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83년 상하이에서 폐기종 합병증으로 눈을 감았던 그의 굴곡진 삶이 메아리친다. '상하이 김염'이란 주소만 써도 팬레터가 배달될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의 출연작은 영화.연극 합쳐 40여편. 1932년 국내에도 영화 '완령옥'으로 알려진 롼링위(阮玲玉)와 주연한 '야초한화(野草閑花)'가 성공하며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그는 주로 항일 영화에 출연했다.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자신의 사인을 담은 브로마이드를 제작, 항일 자금을 지원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도 66년 문화혁명의 후폭풍에 휩싸여 두번째 부인 친이(秦怡)와 함께 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해야만 했다.

평생 '제2의 조국'인 중국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신중국 수립 후 상하이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영화 작가협회 이사 등 고위직을 역임했으나 공산당엔 끝까지 가입하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의 속박에서 자유로운 예술가를 지향했던 까닭이다. "꼭 어디엔가 소속돼야 한다면 그것은 영화뿐이다"는 말을 남겼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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