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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식당서 할랄음식 먹고 ‘사우디클럽’서 기도하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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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5일 오후 한양대 공대에 다니는 사우디아라비아 유학생 무하드 알산(24)이 수업 도중 강의실을 나와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수업이 오후 3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되는 바람에 무슬림(이슬람교 신자)들의 오후 기도(아스르)와 시간이 겹쳤다. 무슬림들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하루에 통상 다섯 번 기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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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가 2010년 무슬림 학생들을 위해 국내 대학 최초로 만든 학내 기도실 ‘사우디클럽’. 무슬림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상 하루에 다섯 차례 이슬람 성지인 메카 쪽을 향해 기도를 한다. [사진 국민대]

강의실에서 나온 알산은 곧장 같은 건물 지하의 기도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이미 네 명의 학생이 모여 기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 한양대에 재학 중인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의 유학생들이었다. 무하드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다른 학생들의 눈을 피해 건물 구석을 찾거나 길거리에서 기도를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이렇게 기도실을 만들어 줘 무슬림들의 공간이 생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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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영문학과에 합격해 지난 2월부터 유학 생활을 시작한 중국인 왕푸(21)는 이달 말 동생 생일을 맞아 3박4일 일정으로 중국에 갈 계획을 세웠다. 인터넷으로 항공권과 은행 환전 서비스를 알아보던 왕푸는 컴퓨터를 끄고 학교 근처의 중국인 유학생 전용 ‘멀티숍’으로 향했다. 한국에서는 쉽게 구입할 수 없는 중국 식료품과 최신호 잡지 등을 판매하는 것은 물론 맞춤형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곳이었다.

외국인 유학생 10만 시대, 대학가 풍속도

왕푸는 멀티숍 주인에게 2만원의 수수료를 내고 ‘항공권 예약 원스톱 서비스’를 신청했다. 날짜별로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찾아 티켓을 예약해 주고 환전과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 노선 안내 서비스도 받았다. 왕푸는 “아직 한국어가 서툴러 학교 생활에서 불편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이곳을 찾으면 대부분 해결된다. 유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인 학생 대다수가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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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유학하는 외국인 학생 수가 올해 처음으로 10만 명을 넘어섰다. 그 영향으로 대학가 주변이 ‘다문화 전진기지’로 변하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으로 국내 외국인 유학생 수는 10만3511명이었다. 2000년 4000여 명에 불과했던 외국인 유학생 수는 2004년 처음으로 1만 명을 넘어섰고 이후 10여 년 만에 10배 가까이로 늘었다. 국내 대학 중 외국인 유학생이 가장 많은 고려대의 경우 총 102개 국가의 유학생 4459명이 재학 중이다. 이 가운데 중국인 유학생이 2973명으로 가장 많다. 중동(123명), 아프리카(75명), 남미(46) 등 아시아 밖의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694명이다.

유학생 수가 증가하며 대학 캠퍼스와 그 주변엔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각종 시설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중국·일본·베트남 등 아시아 지역 출신 유학생들이 대다수였던 것과 달리 유학생 국적이 다양해져 캠퍼스가 ‘작은 지구촌’이 되고 있다.

대학들은 중동·아프리카 등 다른 문화권에서 온 학생들을 위한 맞춤형 시설을 만드는 일에 신경 쓰고 있다. 국민대가 2010년 국내 최초로 무슬림 학생들의 기도공간인 ‘사우디 클럽’을 만든 데 이어 고려대·연세대·경희대 등에도 기도실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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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학생식당 내의 할랄 푸드코트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무슬림 학생들. 2013년에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일주일에 2회 문을 열었으나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얻자 올해 초부터 상시 운영 중이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마련된 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사진 한양대]

한양대는 2013년 국내 최초로 무슬림 학생들을 위한 ‘할랄(Halal) 푸드코트’를 만들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축된 육류와 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과일·채소·곡류만으로 식단을 구성한 학생식당이다. 처음에는 주 2회만 운영하던 할랄 푸드코트는 무슬림 학생 이외의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얻자 올해부터 상시 운영하고 있다.

대학가 주변의 원룸·하숙촌에도 외국인 유학생 10만 명 시대의 변화상이 나타난다. 외국인 학생 유입으로 수요가 늘어나 학교 주변의 원룸과 하숙 가격이 올랐다. 이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온 한국 학생들이 저렴한 곳을 찾아 학교에서 먼 곳으로 밀려가기도 한다. 지난달 고려대 정문 근처에 만들어진 정모(58)씨의 원룸 건물에서는 총 17개의 원룸 중 16개를 중국인 유학생이 차지했다. 정씨는 “원룸 오픈과 동시에 중국인 유학생들이 하루에도 열 통 넘게 전화를 해 당장 계약하자고 했다. 당초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5만원을 받으려 했는데 중국인 유학생들이 월세를 10만원씩 더 내서라도 들어오겠다고 하는 통에 월세를 65만원으로 올렸다”고 말했다.

정부는 외국인 유학생 증가 추세가 이어지자 2023년까지 ‘외국인 유학생 20만 시대’를 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외국인 유학생 유입을 통해 학령 인구 감소에 대비하고 대학 운영도 글로벌화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일각에선 외국인 유학생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는 내실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각 대학이 유학생을 유치하는 것에만 혈안이 됐을 뿐 ‘사후관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국인 유학생들이 겪는 가장 큰 고충은 언어 문제다. 정부는 외국인 유학생의 원활한 한국 적응을 유도하고 학업 중도 포기를 방지하기 위해 입학 자격 요건으로 한국어능력시험(TOPIK) 2급 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 정도 수준으론 한국어 수업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지난해 한국으로 유학 와 고려대에 재학 중인 중국인 A(23)는 “언어는 입학 후 배우면 될 거라는 마음에 한국어 자격증만 따고 입학했던 게 실수였다. 막상 수업을 들어 보니 전공 책과 수업 내용이 너무 어려워 따라가기 벅찬데 학교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은 없다”고 말했다.

외국인 유학생들의 부적응 문제는 중도 탈락률로 나타난다. 2015년 대학알리미 공시에 따르면 지난해에 1985명의 외국인 유학생이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포기했다. 외국인 유학생의 중도 탈락률이 10%가 넘는 학교가 전국에서 모두 20곳이었다. 외국인 유학생들을 무턱대고 입학시키기만 할 뿐 생활 적응과 학습을 돕는 사후 관리는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경기도의 한 4년제 대학 글로벌센터에 4년째 근무 중인 교직원 박모(35)씨는 “학교에서는 무조건 외국인 유학생들을 끌어모을 방안만 내놓으라고 하고 정작 이후 학생들의 정착을 돕는 데는 예산배정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S BOX] 유학생 100명 중 5명꼴 불법체류자 전락…범죄에 가담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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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으로 유학(D-2)과 대학부설어학원연수(D-4-1) 비자로 국내에 입국한 유학생 중 5491명이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온 외국인 유학생 100명 중 5명꼴로 도망자 신세가 된 셈이다. 일부는 한국의 낮은 유학 장벽을 악용해 지방대에 입학신청을 한 뒤 실제로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불법체류하기도 한다.

불법체류자로 전락한 외국인 유학생 중 일부는 범죄의 길로 빠져든다. 지난 3월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사칭해 1억8000여만원의 무역대금을 가로채려 한 나이지리아 출신의 유학생 3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 1월에는 서울 소재 사립대에 다니던 중국인 유학생 2명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해 총 28명으로부터 6800만원을 챙긴 사건도 있었다. 이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용돈을 벌기 위해 범죄에 가담한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는 외국인 유학생의 유학비자 발급을 간소화하는 등 ‘양적 팽창’에 초점을 맞춘 유입 정책을 펼치고 있다. 지난 6월에 단기유학비자(D-2-8)를 신설해 정규 학위과정 외에 계절학기 수강을 위한 유학 비자를 발급하고 있기도 하다. 황재호 한국외국어대 국제교류처장은 “유학생 10만 시대는 ‘무늬만 글로벌’에 불과하다. 유학생 숫자를 늘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실태 조사와 관리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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