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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업체 직원 아들로 태어난 차기 유엔사무총장의 과제는

중앙일보

입력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뒤를 이을 유엔의 새 사령탑이 사실상 확정됐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5일(현지시간) 안토니우 구테헤스(67) 포르투갈 전 총리를 차기 유엔 사무총장으로 유엔 총회에 추천키로 합의했다. 이날 발표장에는 안보리 15개 이사국 대표 15명이 나란히 서서 의외의 단합을 과시했다. 안보리의 확실한 지지가 명확해진 만큼 유엔 총회 표결은 통과 의례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구테헤스는 반 총장이 물러나는 내년 1월부터 5년간 유엔을 이끌게 된다.

구테헤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난민 전문가다. 난민 문제가 지구촌 최대 이슈인 시기에 그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그는 2005~2015년 10년간 유엔난민기구(UNHCR) 최고대표를 지냈다. 이라크·레바논·시리아 등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난민이 폭증하던 시기였다. UNHCR의 인력과 예산은 늘 부족했다. 그는 본부 조직을 획기적으로 줄여 구호의 손길이 절실한 현장으로 내보냈다. 유엔난민기구 웹사이트는 그에 대해 “UNHCR 역사상 가장 심오한 구조개혁을 감독했다”고 적고 있다.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국영 전기회사 직원의 아들로 태어난 구테헤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그는 평소 “살기 위해 도망 나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다. 우리의 선택은 오직 난민의 도착을 어떻게 잘, 인간적으로 다루느냐는 것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부유한 나라들이 난민을 좀더 받아들이고, 세계 도처의 난민들에 대한 지원을 더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탈북자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탈북자들은 북송될 경우 처벌이나 박해 받을 위험이 큰 현장 난민(refugee sur place)’이라며 중국 정부의 탈북자 강제 송환을 강하게 비판해왔다.

구테헤스는 현실 정치의 단 맛과 쓴 맛을 두루 경험한 정치인이다. 대학에서 물리학과 전기공학을 전공하며 물리학 박사를 꿈꿨지만, 대학 시절 빈민가 봉사 경험이 그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대학 졸업 후 사회당에 입당해 핵심 요직을 거치며 21년만에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는 8년간 총리를 지내며 포르투갈 정치의 최정점에 머물렀고,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지도자와 교유했다. 그는 대화와 협상, 설득과 압박을 폭넓게 경험했다. 전직 유엔 관료인 마이클 도일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구테헤스는 UNHCR에서 카리스마와 수완을 보여줬다”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타결을 이뤄낼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구테헤스 앞에는 만만찮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분쟁지역은 늘고 있고 난민은 급증하고 있다. '핵 없는 세상'에 대한 인류의 결의도 도전 받고 있다. 당장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의 역량은 도마 위에 올라있다. 전쟁을 예방하지도, 중단시키지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하지만 강대국들이 협조하지 않는 한 유엔으로선 역부족이다.

아마도 구테헤스에게 가장 난감한 일은 미국·중국·러시아 등 강대국들간에 벌어지고 있는 신냉전일 것이다. 난민도, 분쟁도, 핵개발 저지도 강대국들의 대립 속에선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미국과 러시아가 각각 반군과 정부군을 후원하는 시리아 내전이 단적인 사례다. 시리아 사태는 구테헤스의 첫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구테헤스가 미국과 러시아를 어떻게 다루느냐다. 구테헤스와 미국간 관계는 괜찮은 편으로 평가된다. 영국 BBC 방송은 "미 외교관들과 의원들 모두 구테헤스를 잘 알고 좋아한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구테헤스와 러시아의 관계는 분명치 않다. 러시아는 이번 차기 총장 경선에서 동유럽 출신을 선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신들은 러시아가 1~5차 예비투표에서 줄곧 1위를 고수한 구테헤스를 지지하는 대신 유엔 고위직 확보 유엔 내 영향력 확대를 추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구테헤스의 유엔은 반 총장의 10년과 많이 다를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는 '할 말은 하는' 성격이다. 무대 뒤에서 조용히 컨센서스를 도출하는 반 총장의 조용한 스타일과 확연히 구분된다. 벌써 "차기 총장은 그를 뽑아준 강대국들에 맞설 수 있는 능력에 따라 판단될 것“(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와치의 루이 샤버누 국장)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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