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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병사진단서'에 웃던 경찰, '조건부 부검'에 발목 잡혀

중앙일보

입력

고 백남기씨의 사인을 '병사'로 규정한 사망진단서의 최대 수혜자는 경찰이다. 사망사고의 책임을 최소화할 수 있어서다.

'외인사'되면 '살인사건'수사…경찰에 부담
백선하 주치의 의도 떠나 경찰에 유리
부검영장 조건 이행은 예상 못한 복병

법조계에서도 백씨의 사망진단서가 일반적인 변사사건의 것과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만 취재에 응한 변호사들은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실명 공개를 꺼렸다.

"'병사진단서'는 경찰의 살인 책임 면죄부"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출신인 A변호사는 "병사로 처리한 의사의 결정은 의도를 떠나 경찰에는 면죄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A변호사가 백씨의 사망진단서를 '면죄부'라고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에 따르면 사망진단서는 수사 개시 여부를 판단하는 1차적 기준이다. '병사'일 경우 타살 혐의점이 없다고 보고 사건 처리를 종결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망진단서가 타살 가능성을 암시할 경우 검사의 지휘 아래 경찰이 사건을 조사한다. '외인사'는 타살 가능성의 단서가 된다.

백씨의 사망 종류가 '외인사'라면 검사는 사망 원인을 조사해야 한다. 이 경우 원사인인 급성경막하출혈이 발생한 이유가 원인 규명의 쟁점이 된다. A변호사는 "백씨 머리에 물대포를 조준해 넘어뜨린 경찰의 진압 행위가 백씨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인과관계가 입증되면 경찰은 '과실치사'에 대한 법적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며 "병사 진단은 이런 과정을 피하거나 적어도 시간을 벌 수 있게끔 한다"고 말했다.

변호사들이 보는 백남기 사건

A변호사(부장검사 출신)
"경찰 물대포와 사망의 인과관계 입증되면 경찰은 '과실치사' 법적 책임 면하기 어려워. 병사진단서가 경찰에 시간 벌어줘"
B변호사(판사 출신)
"병사 인정되면 경찰 책임은 부상 정도. 국가 상대 손해배상 등 민형사상 국가 책임 축소돼"
C변호사(경력 28년)
"백 교수 혼자 병사 고집. 재판 가면 오류 밝혀질 수밖에 없어"

판사 출신 B변호사도 "'병사 진단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백씨의 선행사인이 외부의 충격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도 사망의 종류를 병사로 처리한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만약 병사가 인정된다면 경찰은 사망사고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된다"며 "경찰이 지게 될 책임은 '과실치상', 즉 부상에 대한 책임 정도로 국한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향후 형사적 책임과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30년 가까이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C변호사는 "어차피 부검을 하든 나중에 재판을 가게 되면 사망진단서의 오류는 밝혀질 수밖에 없다"며 "모든 의사들이 잘못됐다고 하는데 주치의(백선하 교수)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백 교수의 진단에 대해 대한의사협회도 공식 입장을 내고 '병사' 기재가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백 교수의 결정을 지지하는 의사는 아직 한 명도 없다.

"조건부 부검영장은 경찰도 예상 못한 복병"

부검 필요성에 대한 의견은 다소 엇갈렸다.

A변호사는 "사망 원인에 대해 이견이 있다면 부검은 꼭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백씨의 사망 원인이 논란의 여지 없이 명백하다면 모르겠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 지금은 논란이 진행 중이지 않느냐"며 "논란을 끝내려면 부검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A변호사는 "의심과 불순한 의도의 개입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한 것으로 본다"고 의미를 해석했다. 그는 "법원이 조건을 달아 부검영장을 발부하리라고는 아마 경찰도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라며 "병사 진단서로 안심했던 경찰이 새로운 복병을 만난 셈"이라고 말했다.

법원이 발부한 백남기씨 부검영장 조건

▶부검장소에 관해선 유족 의사를 확인해 유족이 시신 보관장소인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부검하기를 원하는 경우 부검 장소를 서울대학교병원으로 변경하고, 그 장소에서 부검을 실시하여야 함.
▶유족이 희망하는 경우에는 아래 사람들을 부검에 참여시켜 참관하도록 하여야 함.
   - 유족 1~2명
   - 유족이 지명하는 의사 2명, 변호사 1명
▶부검 실시 이전 및 진행 과정에서 부검의 시기 및 방법과 절차, 부검 진행 경과 등에 관하여 유족 측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함
[출처: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

백씨의 유족 측은 부검을 완강히 반대하고 있다. 경찰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B변호사는 "법원이 발부한 조건부 부검 영장은 이런 유족의 입장을 반영한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통상적으로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소속 부검의에 의해 집행된다. 그러나 백씨에 대한 부검 영장은 유족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유족이 원하는 장소에서 참관인 입회 아래 부검을 실시하라는 내용이다.

다만 C변호사는 "백씨의 사인이 명백하고 물대포에 맞아 즉시 의식을 잃은 증거가 많이 있다"며 "부검해야 할만큼 의혹이 크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른바 '빨간우비' 루머에 대해서도 "당시 영상기록들을 분석하면 얼마든지 규명할 수 있는 일"이라며 "루머에 휘둘리지 않는 게 이 정부가 천명해온 원칙 아니었느냐"고 되물었다.

한편 백씨에 대한 부검영장 집행 기한은 오는 25일까지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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