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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에서 온 남자 뮤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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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호 34면

1. 아내는 나의 뮤즈다.


2. 뮤즈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다. “뮤즈는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 명의 딸들로 시와 연극, 춤과 노래에 능하고, 시인과 예술가에게 영감과 재능을 주는 예술의 여신이다. 오늘날에는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3. 아내가 아홉 명은 아니지만, 시와 연극, 춤과 노래에 능하지도 않지만, 또한 내가 시인이나 예술가도 아니지만, 아내는 언제나 나에게 영감을 준다. 나는 글이 안 써지고 글감이 궁할 때마다 아내를 팔아 글을 썼다. 그렇게 아내를 팔고 또 팔아 지금껏 글을 썼으니까 어쩌면 아내는 아홉 명이 아니라 아흔아홉 명인지도 모르겠다.


4. 아내는 나의 뮤즈였다. 이제는 아무리 아내를 바라봐도, 뚫어지게 바라봐도 영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역시 아내는 한 명인 것이다.


5. 선이 있으면 악이 있다. 불의가 있으면 정의가 있다. 어둠이 있다면 반드시 빛이 있을 것이다. 브루스 윌리스와 사무엘 잭슨이 주연한 영화 ‘언브레이커블’에서 유리처럼 잘 다치고 부서지는 유리선생, 엘리야는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한다. 나처럼 잘 깨지는 존재가 있다면 틀림없이 세상 어딘가에 나와 정반대로 결코 부서지지 않는 존재가 있을 거라고.


글감이 떨어지고 영감이 사라진 나는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한다.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다면 영감을 빼앗아 가는 존재도 있지 않을까?


6. 1797년 여름 영국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 콜리지는 엑스무어 근교에 위치한 농장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궁전건축에 대해 쓰여있는 퍼처스의 책 『순례』를 읽다가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콜리지는 책에서 읽은 문장들이 쿠빌라이 칸 궁궐의 이미지들로, 그 이미지들은 300행에 이르는 시로 펼쳐지는 환상을 경험한다. 더 환상적인 사실은 꿈에서 깬 그가 시 전체를 낱말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둘러 종이와 펜을 찾아 시를 한 행 두 행 빠르게 써 내려갔다. 그러던 중에 누군가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 사람은 콜리지에게 돈을 좀 빌리기 위해 가까운 도시인 폴록에서 온 사람이었다. 콜리지는 얼른 그 남자에게 돈을 주고 쓰다만 시를 쓰기 위해 책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 나머지 시구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후였다. 결국 콜리지의 ‘쿠블라 칸’이라는 시는 50여 행의 미완성 유고로 남았다. 그리고 ‘폴록에서 온 남자’는 영감을 빼앗아가는 존재로 남았다.


7. 폴록에서 온 남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콜리지처럼 그 남자도 시인이었을까? 돈을 빌리러 갔으니까 아마 그는 가난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돈이 필요했던 사람, 돈이 절박하게 필요해서 시인을 찾아갔던 사람, 부자가 아니라 시인에게 돈을 말하기 위해 폴록에서 간 사람.


그는 빚에 쫓기는 사람이었을까? 일용할 양식이 떨어졌던 것일까? 가족 중에 병자가 있었을까? 한 번이라도 남에게 돈을 빌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한번이라도 돈을 빌리기 위해 남의 집 문 앞에 서 있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돌아서고 돌아섰다가 다시 돌아서 마침내 남의 집 문을 두드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 절박한 비참함을, 그 비참한 절박함을.


8.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시도 사라졌다면 그 사라진 250여 행의 시는 폴록에서 온 남자가 받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남자가 콜리지에게 돈을 빌리는 그 순간, 시의 영감이 사라지는 그 순간, 낭만주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닐까? 영감을 기다리지 않고, 영감에 기대지 않고 글을 써야 하는 시대의 뮤즈는, 현대의 뮤즈는 ‘폴록에서 온 남자’인지도 모른다.


9. 이렇게 글을 못쓰고 끙끙대는 내게는 분명히 ‘폴록에서 온 남자’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자주 나를 찾아온다. 자주 찾아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내 등에 붙어 함께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취업준비생 아들이 용돈 보내달라는 문자메시지가 자꾸 들어온다.


김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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