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커피하우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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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요즘 시내 곳곳에 새로운 형태의 커피하우스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다양한 종류의 커피들이 수입돼 한국의 커피문화가 질적인 변화를 맞고 있다.

지금은 산지도 남미.아프리카.아랍지역 등 여러 곳이고 종류도 수백가지나 되지만 커피는 원래 아랍세계의 특산품으로 원두의 국외 유출이 엄격히 금지된 물품이었다.

이런 커피가 세계화의 길을 간 것은 1616년 네덜란드의 한 상인이 인도인 순례자에게서 커피의 원두를 입수, 인도네시아에서 대량 재배에 성공하면서부터다.

커피의 유행은 유럽사회를 바꾸기 시작했다. 커피와 함께 커피하우스.커피살롱 등으로 불리는 다방(茶房)문화가 탄생하면서 당시의 전제왕정에 비판적인 정치인.예술인들의 사교장을 만들어 준 것이다.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650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런던에, 그 2년 후에는 프랑스 마르세유에 잇따라 커피하우스가 출현했다. 커피하우스는 귀족 클럽문화의 전통이 강한 영국과 유럽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회원이 아니어도 누구나 입장료 1페니만 내면 커피를 마시면서 자기와 사상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정담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피하우스는 '페니대학(大學)'이라고도 불렸다.

페니대학을 중심으로 정치변혁에 대한 분위기가 높아가자 당국은 이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청교도혁명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했다 돌아와 왕정을 복고시킨 영국의 찰스 2세는 커피하우스의 폐쇄를 명했다.

하지만 격렬한 반발에 밀려 11일 만에 물러서고 말았다. 페니대학은 18세기 초엔 런던에만 무려 3천여개를 넘었다. 하지만 명예혁명을 거쳐 앤 여왕이 즉위하면서 시민권이 향상되고 정치가 안정을 되찾자 페니대학도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국에서도 커피는 정치와 연관이 깊다. 조선 말 궁중과 손탁호텔 주변에서 커피는 개혁파의 상징적 기호품이었다. 식민지 시대엔 지식인들이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울분을 토했고 군부독재 시절엔 대학인들이 다방에서 토론을 벌였다. 영국의 페니대학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민주화 후 티켓다방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던 다방문화가 요즘 새로운 형태로 부흥하고 있다. 대형 외국계 커피하우스들이 새로운 담소의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이 시대 커피하우스 문화의 부흥이 우리 사회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