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구주중부는 고구려의 식민지|일본의 뿌리 한국문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확실한 물적 증거가 있는데도 일인학자들은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고구려가 2,3세기께부터 7세기, 즉 망할 때까지 구주중부지대에 진출, 그곳을 식민지로 삼아 많은 물자를 본국에 조달한 사실을 말하려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 엄연한 사실을 눈감아버리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복강(후쿠오카)에서 고속도로(구주자동차도로)를 따라 남진하면 채 한시간도 못달려 국수인터체인지에 닿는다. 여기서 다시 시골길로 9㎞쯤 달리면 옥명(다마나)시가 나온다. 유명한선산(후나야마)고분이 위치한 곳.
필자는 지금까지 이곳을 10여 차례 찾아갔다. 바로 고구려의 유물·유적이 산재한 지역이다. 구주중부에 깔린 고구려의 농후한 흔적과 영향을 역력히 확인할 수 있다.
구주의 중부, 웅본(구마모토)현의 북서부를 흐르고 있는 국지(기쿠치)천 유역은 고구려가 오랫동안 정착한 중심지였다.
필자는 웅본시에 거주하는 고대사연구회 대표이사 고한(고가)삼박씨의 안내로 옥명군 국수정강전에 있는 고분과 그 출토품, 고구려인이 자기들 풍습에 따른 제양터라고 추정되는 곳들을 둘러보고 그 역력한 고구려적 요소를 확인했다.
국수정 강전이란 곳에 청원(새발)이라 부르는 작은 언덕이 우뚝 서 있는데 그곳에 한 고분이 있다. 나무들이 주변을 빽빽이 둘러싸고 있다. 이것이 유명한 선산고분이다.1873년 발굴되어 2백여점의 눈부신 출토품이 나왔다. 그중 몇점은 국보로 지정되어 지금 동경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이지방 박물관에는 그 모조품이 전시되어있다.
이들 중 특히 주목할 출토품은 한자루의 큰칼(대도)과 묻혀 있는 인물이 생전에 쓰고 있었던 관모다. 대도는 칼 몸에 국화무늬가 있고, 거기에 은으로 상감 한 명문(한자글귀)이 있다.
이 고분의 축조시기는 대체로450년께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당시 이같은 정교한 공예기술이 일본에는 아직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칼은 필시 외래품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것을 만든 나라는 어디고, 또 명문의 내용은 어떤 것이며, 이것을 소지한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가 궁금하다.
대도의 명은 다음과 같다. 애석한 것은 오래 되어 75자 중에 19자가 잘 보이지 않아 해석이 구구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서는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대왕세봉□□조인명무□□팔월중용대□부정사척□도팔십련륙십□삼촌상호□도복차도군장수자손□□득□은야부실기소통작도자이대□서군장안야
이 명문의 해독을 놓고 일인학자 복산민남은 반정천황(406∼411년) 때『무□란 사람이도공인 이태가로 하여금 대도를 만들게 했다』는 내용으로 보았고, 북한사학자 김석형은『무이가 지휘해서 8월에 큰 용광로를 써서 4척되는 칼 세자루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읽으면서 이 칼은 백제의 개로왕이 신속하고 있던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 하였다.
필자는 명문가운데 나오는 「대왕」이란 용어가 일본·우리나라사서에 쓰인 예라든가, 명에 나오는 인명의 특징, 거기에 이 국수정일대에 산재한 유적·유물이 고구려적이란 점등을 고려해서 백제왕이 아니라 고구려왕일 가능성이 짙다고 보면서 다음과 같이 풀고자한다.
『□□□□□□□대왕시대에 대왕의 명을 받은 인검을 맡아보는 관청의 담당자인 무□□가,8월중에 큰 용광로를 써서, 길이 4척의 정도 80진(자루)과 길이 3촌의 극히 품질이 좋은 단도 60진을 만들어 냈다. 이 대도를 차는 자는 장수하며, 그 자손은 길이 번영할 것이며, 자기 직책을 완수할 것이다. 도를 직접 만든 사람은 이대□이요, 이 명을 쓴 사람은 장안이다.』
이같은 도신이 1m50㎝, 페가소스(부마)와 열두 꽃잎의 국화무늬에, 화자의 명문을 상감한 우아한 물건이다.
고구려의 풍습에 귀족들은 허리에 칼 다섯 자루를 차도록 되어있었다. 중국의『태평어예』에『고구려에서는 허리에 은 띠를 매며, 왼편에는 숫돌을 차고 바른편에는 오도자를 찬다』 라고 되어있다.
고구려는 입지조건상 항상 물자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 타개책으로 많은 기술자를 구주중부지대, 즉 국지천 유역에 정착케 하여 식량을 비롯한 소금·사철 등을 생산해서 배로 수송했고 그 총지휘자에는 고관이 파견되어 지휘하다가 객지에서 죽으니 그가 곧 이 고분의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하고 필자는 추정한다.
선산고분출토품 중 또 하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관모다. 대도와 함께 매장되었던 인물이 생전에 쓰고 다녔던 것에 틀림없다.
우선 관모의 구조는 금동제품인데 형상은 용무늬를 투각한 2장의 금동판을 구부러진 가장자리에 붙여놓은 봉지모양으로 된 것이다. 가장자리 한쪽에는 뱀이 기어가는 형상을 한 철사 끝에 구술모양의 장식물이 달려있다.
일본학자들은 이 관모를 신라, 또는 백제왕이 왜왕에게「공헌」(공물을 바침) 한 수입품이라 주장, 어디까지나 자기들이 우의에 있다는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대해 북한사학자 김석형은, 대도와 마찬가지로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니 두사람의 견해는 결과적으로 매장된 인물이 왜왕이 되는 셈이다.
대체로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관모를 백화(자작나무)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금관·금동관으로 발전해 나갔다. 삼국의 관모는 공통성도 있었으나 모양과 장식면에서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고구려 관모에 대한 기록을 보면, 가령 『위지』에『공시행사의 의복은 모두 비단(금수)에 금으로 꾸민다. 대가·주부의 관리는 머리에 책(머리수건)을 쓰는데 뒷머리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쓴다. 모양은 변(고깔)과 같다』 고 되어있다.
대가나 주부와 같은 높은 벼슬아치는 중국의 책과 비슷한 관모를 쓰지만 뒷부분이 없는 것이 다르다고 하였다.
책 같으되 뒷머리가 없는 고구려관모는 바로 선산고분 출토의 관모와 일치한다. 고구려의 책모양의 관모와 하급관리가 쓰는 절풍은 고구려의 벽화고분에서 볼 수 있다. 쌍영총(5세기말)·대안리 제1호 고분(5세기초)·약수리벽화고분(4세기말∼5세기 초)등에 나타나 있다.
벽화에 나타난 관모를 보면(주영헌저『고구려벽화고분』·일어판)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는 듯이 보인다.
벽화에 나타난 관모는 다양하지만 오래되어 마멸이 심해 똑똑히는 알 수 없으나 앞서 문헌에 나타난 책 비슷한 관모는 벽화에 확실히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의「책」이란 일종의 두건같은 것이다. 갓 아래 쓰기도 하고 이대로 써서 관모로도 된다.
『책은 머리를 감추는 건으로, 항상 관아래 있으며, 때로는 이대로 쓴다』(『급취편삼』) 라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사람의 눈으로는 고구려의 관이 책 같으면서 뒷머리가 없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아뭏든 선산고분 출토 관모가 고구려 것이라면 1천4백년 전 옛 고구려 관모를 이곳에서 보게되니 그 뜻이 깊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