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은」협정의 본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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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른바 「최악의 불평은 협정」으로 불리는 한-미 항공협정을 손질하는 문제를 놓고 서울회담이 27일부터 열리고 있다.
양측 실무책임관리들이 대좌하는 이번 회담은 80년 4월 그나마 일부 수정하기로 합의해 놓고도 미국 측이 6년이 지나도록 미뤄 오고 있는 「양해」각서이행 문제를 다룬다.
두 나라의 항공협정은 57년4월에 체결, 그후 몇 번 수정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불평은 협정의 표본이 되어 있다.
한마디로 미국 항공기는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든 서울로 운항할 수 있고 또 서울을 거쳐 세계 어느 나라든 날아갈 수 있다.
우리나라 비행기는 어떤가. 그 동안 두 차례의 개정을 통해 대한항공의 운항노선이 호놀룰루,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 3개 노선으로 확대되었으나 미국에서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는 「이원권」은 물론이고 미국 안의 다른 지역으로도 갈 수 없게 되어 있다.
미국의 9개 도시에 이원권까지 확보해 놓고 있는 일본을 비롯해 심지어 필리핀과 태국, 대만마저 각각 6∼11개 도시에 운항할 수 있으며, 이원권까지 갖고 있는 것과는 너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80년 4월 워싱턴에서의 제3차 개정회담 때 김포공항에 미 항공사 전용 화물 터미널 건설을 조건으로 대한항공의 미국 내 시카고 등 교포가 많이 사는 3개 지점 운항 권과 유럽 이원권 1개 노선을 허용한다는 양해각서를 교환했었다.
그러나 미 항공 화물회사나 우리측이 김포공항에 짓기로 되어 있던 터미널을 양해 각서에 명시된 대로 81년 3월22일까지 완공하지 않았다는 꼬투리를 잡아 미국 측은 양해각서 이행을 여태껏 미루고 있고 지금에 와선 이 각서의 실효를 주장하고 있다.
50년대 우리 정부가 항공분야에 눈이 어두웠고 우리 민간비행기의 미국운항은 꿈조차 못 꾸던 시절이어서 그런 협정을 맺었던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항공협정 사례를 단 한번이라도 참고하고 정책당국자들의 안목이 깊었던들 현실은 달랐을 것이다. 또 80년 양해각서 가조인 후만 해도 김포화물터미널 건설을 우리가 완공했거나 공사지연 등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최소한의 안전판을 마련해 두었어도 문제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받아 낼 것 다 받아 챙겼으니 줄 필요가 없다는 속셈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이 핑계 저 핑계로 협정이행을 미루고 있는 미국 측의 태도는 민주 우방의 리더를 자처하는 나라가 취할 태도는 아니다.
불평등 항공협정만 놓고 보아도 국가간에 이뤄지는 모든 협정은 쌍방간에 평등원칙에 따라야 하고 상호 이익이 기울지 않도록 호혜평등주의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은 국제사회의 상식이다. 미국은 시장개방을 요구하면서 말끝마다 상호이익과「공정」한 거래를 내세우고 있지 않는가.
항공협정이 약간만 기울어져 있다면 또 모르겠으나 아시아에서도 유례가 없는 지나친 불평등이라면 그 협정을 무효화해도 국제상규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법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국내법도 상대방의 궁박이나 경솔, 무 사려·무경험 등을 이용해 불공정하거나 사회상규에 어긋나게 맺은 계약이나 법률행위는 무효화하고 있다.
국내법이 이럴진대 호혜평등의 원칙과 이념을 지주로 하는 국제간협정도 예외일 수 없다. 하물며 우리 정부의 외교경험이 일천하고 대미의존이 높을 때 불리하게 맺었던 협정을 바로잡는데 성의를 보이지 않거나 이를 외면한다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
이번 회담이야말로 미국이 기회 있을 때마다 내세우는 페어플레이와 룰, 미국의 양식을 진정 행동으로 보여주는 자리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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