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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첨단소재 무장한 K패션, 이번엔 뉴욕 뚫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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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한국 휴대전화와 가전은 세계 시장에서 1, 2위를 다툰다. 자동차는 세계 5위권 생산국이다. 전후 반세기 만에 제조업 강국으로 우뚝 선 한국 산업이지만 유독 맥을 못 추는 분야가 있다. 바로 패션, 그중에서도 여성복이다. 몇몇 의류 브랜드가 중국에 진출했지만 세계 패션의 주무대인 유럽과 미국에서 존재감이 있는 여성복 브랜드는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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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복 브랜드 구호가 지난 14일 미국 뉴욕에서 2017년 봄·여름(SS) 시즌 프레젠테이션을 열었다. 진 콜린 삼성물산 패션부문 상무(오른쪽 둘째)가 런던 셀프리지 백화점의 여성복 바이어와 상담하고 있다. [사진 삼성물산]

여성복은 왜 어려울까. 전문가들은 옷은 라이프스타일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분야보다 장벽이 더 높다고 설명한다. 김승현 SADI 교수는 “제품 역사가 짧은 스마트폰과 수백 년 생활 습관이 배인 옷은 다르다”고 지적한다. “일할 때, 미팅이나 파티, 주말에, 그리고 관혼상제 등 시간·장소·상황(TPO)에 따라 옷을 입는 서구의 라이프스타일을 꿰지 않으면 팔기 어려운 게 옷”이라는 설명이다.

“성급한 명품 컨셉트가 패인”
재킷 50만원대 … 가성비 높여 공략

그간 국내 패션기업들이 글로벌 무대에 도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여성복 브랜드 ‘오브제’의 윤한희·강진영 디자이너가 2001년 뉴욕 컬렉션에 진출한 후 비교적 성공했다는 평도 받았으나 현재는 사업을 아예 접었다. ‘헥사 바이 구호’의 정구호 디자이너도 2010년 뉴욕패션위크 문을 두드린 경험이 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채 2013년 결국 해외 사업을 접었다. 이상봉 디자이너와 손정완 디자이너가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다.이런 와중에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다시 구호를 내세워 글로벌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소호에서 2017년 봄·여름 컬렉션을 공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열고 미국·유럽의 유명 백화점 바이어와 패션 전문가에게 신상품을 선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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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패션업체 오브제는 2001년 여성복 브랜드 ‘Y&Kei’로 뉴욕에 진출했다. ‘Y&Kei’의 2007년 봄·여름(SS) 뉴욕 컬렉션 쇼.

구호 해외 진출의 시작은 철저한 패인 분석이었다. 우선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확 바꿨다. 윤정희 삼성물산 여성복 사업부장은 “뉴욕과 파리에서 ‘헥사 바이 구호’ 쇼를 8차례 했지만 솔직히 비즈니스에 대한 확신이 안 들었다”면서 “브랜드가 미처 알려지기도 전에 명품 브랜드 수준으로 가격을 설정하니 잘 팔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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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는 2010년 하이엔드 브랜드 ‘헥사 바이 구호’로 뉴욕에 처음 도전했다. 성대한 패션쇼를 열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판매 부진으로 2013년 철수했다.

이번 재도전은 그래서 핵심 경쟁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삼성이 직물회사에서 출발했다는 점에 착안해 퀄리티 있는 소재를 새로 개발했다. 직물 연구개발(R&D)팀과 협업해 구호만을 위한 소재를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사방으로 늘어나는 스트레치 원단, 생활 방수와 오염 방지 기능을 더한 소재 등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 중국과 동남아에서 제조하는 경쟁 브랜드와 달리 전 제품을 한국에서 만들어 품질을 더 높였다. 저성장 시대에 가성비 높은 제품은 어디서나 통할 것으로 내다보고, 브랜드 자체를 명품으로 포지셔닝하기보다 명품 브랜드 입는 고객이 믹스 매치(섞어입기)하기 좋은 브랜드로 성격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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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뉴욕에 재도전하면서 거품을 빼고 작은 행사장을 빌려 옷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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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 2017 SS 컬렉션

이 같은 새 전략의 성패 여부는 본격적으로 내년 봄 상품이 판매되기 시작해야 판가름 난다. 하지만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다. 뉴욕과 런던, 파리의 유명 백화점들이 신제품을 대량으로 구매했기 때문이다. 뉴욕 최고급 백화점인 버그도프 굿맨, 색스피프스애비뉴, 시애틀의 노드스트롬, 런던의 셀프리지 백화점에 들어가기로 확정됐다. 파리 봉마르셰 백화점과는 최종 협상 중이다. 한국 여성복 브랜드로서는 드문 성과다. 봉마르셰의 제니퍼 카바이에 패션 디렉터는 “전통적인 아이템을 살짝 비틀어 새로운 룩을 만들어낸 점이 인상적이었다”면서 “특히 패브릭이 좋아서 명품을 선호하는 고객들이 좋아할 것 같다”고 말했다.

6년 만에 글로벌 시장에 재도전하는 구호의 ‘선장’은 진 콜린(44) 삼성물산 패션부문 글로벌익스팬션팀 상무다. 콜린 상무는 삼성이 해외 진출을 위해 영입한 인물. 캐나다 이민 가정 출신인 그는 FIT와 뉴욕대 경영대학원(MBA) 졸업 후 샤넬과 펜디 미국 지사를 통해 패션업계에 발을 들여놨다. 홍콩 레인크로퍼드 백화점(여성·남성 의류 총괄)을 거쳐 2012~2015년 갤러리아백화점에서 MD디렉터를 지냈다. 뉴욕 현지에서 그를 만났다.

해외시장에 재도전한 이유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복 브랜드를 키워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있었다. 미니멀한 디자인과 고품질이 해외 주요 시장과 잘 맞아 성장 잠재력이 높다고 봤다. 3~4년 전부터 준비했다. 과거와 달리 실용적으로 접근했다. 10분의 패션쇼보다 옷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2시간의 프레젠테이션을 선택했다. 행사장도 싸게 빌릴 수 있는 소박한 곳을 골랐다.”
왜 뉴욕인가.
“당초 접근이 쉬운 홍콩이나 중국을 고려했다. 하지만 브랜드의 지향점과 상품 성향이 현대적 느낌이 강한 뉴욕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공략할 만한 패션 시장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홀세일(도매) 시장이기도 하다. 패션 트렌드, 리테일 환경은 미국이 아시아보다 3~4년 빠르다.”
어떤 브랜드가 경쟁 상대인가.
“필립림, 헬무트랭, 알렉산더왕, 아크네 같은 브랜드들과 비슷한 위치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한다. 가격 측면에서는 띠어리와 비슷하게 책정했다. 팬츠 390달러(약 45만원), 재킷 450달러(약 50만원), 코트류 1000달러(약 120만원) 이상으로 국내 판매 가격과 비슷하다.”
지금까지 한국 패션 브랜드가 글로벌 주무대에서 성공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뭘까.
“홀세일 위주인 해외 백화점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한국 백화점은 각 패션 브랜드가 직접 매장을 운영하는 몰(mall) 시스템인 반면 해외는 백화점 바이어가 의류를 직매입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홀세일 방식이다. 백화점마다 개성이 다르고, 고객 취향 또한 다르기 때문에 이에 맞게 상품 전략을 짠다. 의류업체는 해당 백화점의 고객 포트폴리오에 적합한 상품을 적극적으로 제안해야 하는데, 국내 백화점 방식에 익숙한 패션업체들이 선제적으로 바이어를 파고들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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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진출 원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조언하면.
“바이어들에게 일정 수준의 디자인과 품질을 갖춘 옷을 장기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한국에서는 판매 시점보다 3~4개월 전에 디자인을 완성하지만 해외에서는 2년 전부터 전략을 세운다. 순간의 크리에이티브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한류 전성시대다. ‘한국’이란 브랜드가 영업에 도움이 될까.
“아직은 한국이 ‘패션’을 언급할 때 바로 떠오르는 나라는 아니다. 이세이 미야케, 요지 야마모토, 꼼데가르송 같은 일본 브랜드도 오랜 기간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미국 시장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다. 아시아 브랜드는 여전히 ‘비싸지 않은 물건’이란 인식이 있다. 다만 K드라마, K뷰티 덕분에 한국 여성들이 세련됐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호기심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뉴욕=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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